귀인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온 기회

by 쉐비

어쩌면 오늘 응하러 가는 면접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년 말은 내가 정년퇴직한 지 딱 2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또다시 해가 바뀌어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 1월 초순, 나는 수원에서 지하철을 타고 담담한 기분으로 7호선 하계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도할 만큼 했으니 이번에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작정이었다. 이미 달관한 경지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노라고 순순히 인정할 때 미련도, 후회도 퇴색해 사그라지고 마는 것 같다. 이미 그런 생각을 한 때문인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즐길 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를 면접장으로 초대해 준 주택관리업체가 하계역 근처에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곳은 그동안 내가 기다리며 보낸 시간만큼이나 지루하고 먼 길이었다. 지하철 열차가 강남구청 역을 지나 한강의 청담대교를 건너는 동안 차창 밖으로 서울의 풍경이 갑자기 쏟아지듯 펼쳐졌다.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한강 변 양쪽에 즐비하게 서 있는 고층 빌딩들이 담담한 나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왠지 기분이 상큼하게 리프레시(refresh)되는 것 같아 좋았다. 면접이 오후 3시에 예정돼 있으니 늦지 않게 와달라는 연락이 있었다. 다시 찾아온 귀한 기회이기에 이른 점심을 먹고 서둘러 가는 길이다. 지하철로 얼마나 걸릴까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보았다. 하계역까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다. 지하철역에 내리면 목적지 건물까지 또 찾아서 걸어가야 하니 족히 30분은 더 플러스하고 출발하였다.



지난달 초,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며 관리업체로부터 축하 이메일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니 과제물이 들어있었다. ‘귀하께서 관리소장이 되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를 파워포인트로 작성하여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파워포인트로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문이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 든 사람 중 그게 힘들면 미리 포기하라는 신호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 속에는 나도 충분히 포함돼 있을 수 있다는 데에까지 상상력이 작용하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그런 문제에 걸려들 수야 없지^^’. 나는 딸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 검색을 하며 배경 무늬로 쓸 만한 이미지를 선택하고, 자신감 넘치는 엄지 척 그림까지 삽입해 자료를 완성하였다. 타이틀을 뭐라고 달까 고민, 고민하다가 배경 이미지와 잘 어울릴 만한 제목을 뽑아냈다. ‘루이뷔통급 관리소장이 되겠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멋져 보여서 딸과 함께 쾌재를 부르며 하이 파이브(Hi-five)를 했다. 그날 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아내도 PC 앞으로 불러서 봐달라며 나는 미니 프레센테이션(presentation)을 하였다. 아빠를 도와 작품을 완성하게 해 준 딸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으쓱했다. 아내는 콧구멍이 발씬거리도록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엄지 척을 했다. 심야에 우리 가족은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 자료를 관리업체에 이메일로 보낸 후 거의 3주 만에 연락이 왔다. 2차 심사에 합격하였으니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 없어서 그것으로 끝난 줄로만 알고 잊고 있었다.



관리소장이 돼보겠다고 도전하면서 이토록 정성껏 자료를 만들어 보내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관리업체가 요구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연말이 임박한 그때가 정년퇴직하고 만 2년이 되는 시점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자’. 퇴직 후 2년 동안 줄기차게 이메일로 이력서를 날려 보내며 혹시나 불러주는 데 있을까 하고 기다렸으나 결과적으로 모두가 허사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끈질기게 도전한다면, 분명히 맞아떨어지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신념에 가깝도록 갖고 있었다. 마치 굳게 닫힌 금고문을 열기 위하여 눈금 번호를 좌우로 요리조리 돌리며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똑 떨어지며 문이 활짝 열리듯,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면 언젠가는 닿는 기회와 인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지나친 낙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퇴직 후 3년째에 접어들도록 그러한 시도를 계속한다는 것은 애처롭고 추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의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가상한 뜻을 확실히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60세 정년퇴직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평가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바보 소리를 들을지언정 절대 뒷거래로 재취업하지 않겠다는 나의 외곬 소신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결과가 실패라면 실패요, 좌절이라면 좌절이라 해도 나는 거부하거나 토를 달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뒷맛이 씁쓸한 것은 우리 사회에 기회의 문이 이토록 비좁다는 현실을 목격하고 실감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인터넷 이메일을 열고 그동안 보냈던 메일이 몇 개나 되는지 일일이 헤아려보며 지난 2년 동안의 구직활동을 정리해 보았다. 오늘 나에게 면접의 기회를 준 주택관리업체에 보낸 메일이 마지막 186번째로 매달려 있었다. 지그시 눈이 감겼다. ‘그래. 고생 많이 했네. 이제 포기하자. 포기해야 해 ㅠ.ㅠ’.



그렇게 관리소장직 구직활동을 접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월 1일 새해 첫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장 후배로부터 인사차 전화를 받고 대전환의 기회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 그래. 자네도...“ “요즘 어디 나가시나요?” “아니... 아직도 잘 놀고 있지 뭐. 허허...” “그렇군요. 저기, 우리 단지에서 관리소장을 뽑는다는데 어떠세요? 특별히 청렴한 사람을 모시고 싶다는데 선배님이 제격인 것 같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전화로 갑자기 접하게 된 정보라 얼떨결에 잠시 뜸을 들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나는 곧바로 “좋아!“하고 대답해 버렸다. 평소 나답지 않게 신속하고 명쾌한 반응을 그에게 보여줬다. 인연이 닿으려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토록 찾던 일자리를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갑작스럽게 얻게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되고 흐뭇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친구가 바로 ‘귀인(貴人)’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재직 시절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닌 약한 고리였는데 나에게 이런 기회를 물어다 주다니. ‘이 부장, 고마워, 정말 고마워!!!’ 후배 덕분에 도전 횟수를 하나 더 더하게 되었고, 마침내 187번째 만에 관리소장 자리를 움켜쥘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서는 당분간 정지작업과 구인절차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늦어도 1월 말까지는 다 정리되지 않겠냐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그 사태 추이를 간접적으로 지켜보기로 하고 서서히 출격할 채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하계동에서 면접 결과를 통지하는 이메일이 도착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주식회사 0000 관리입니다. 당사의 1기 관리소장 공개채용 절차가 최종 마무리되어 안내드립니다. 본 안내 메일은 2021년 1월 8일과 1월 11일 양일간 진행된 최종 면접자를 대상으로 발송되는 메일이며, 면접에 참여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종 면접 결과는 본 메일 하단부의 결과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라며, 합격자분들께는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아쉽게 금번 면접에서 불합격되신 분들께는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들이 우수한 역량을 갖추어 많은 숙고를 하였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면접의 결과는 합격과 예비합격, 그리고 불합격으로 구분되며 합격자분들께는 별도의 유선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비합격은 1기 공채 합격자 교육 및 활동계획 수립 중 결원 발생이나 충원 필요시 대비 및 타 분야 채용 등 협의 진행 대상으로 추후 별도의 연락을 드릴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당사의 관리소장 공개모집에 응시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향후 좋은 기회가 마련되어 다시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결과 : 불합격】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무참히 침몰하는 나룻배처럼, 지난 2년간 쉼 없이 시도한 나의 도전은 이토록 뚜렷한 메시지에 격침되며 막을 내렸다. 하지만, 시종일관 응모자의 자존심과 인격을 존중하며 정중하게 대우해 준 하계동 주택관리업체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소감을 남겨두고 싶다. 예정된 결론을 갖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지론에 충실하기 위해 찾은 곳이기도 했다. 이제 막 연극을 마친 배우처럼 마음이 후련해졌다.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1월 하순, 드디어 나는 약 1천 세대에 달하는 아파트 단지에 관리소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런 기회는 언제나 문제, 욕구, 혹은 결핍의 모양으로 얼굴을 내민다. 문제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초보는 성취의 달콤한 맛을 느껴볼 새가 없다.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도전과 응전, 마땅히 내가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몫이다. 삶은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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