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

늦깎이 벤처 하는 마음으로

by 쉐비

새로운 시작은 설렘과 긴장이 뒤섞이며 온갖 촉각이 곤두서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일 오전 10시 본사에서 회장님 임명장 수여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해준 사람은 본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준비물과 찾아오는 길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궁금해서 묻는 말에도 그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성의껏 대답해주는 태도가 고마웠다. 나는 그쪽 분위기가 어떠한지 알아보고자 촉각을 곤두세우며 전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일부러 통화를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짜증이나 거부감이 섞여 있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아침, 출발 준비를 시작하느라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박사의 글이 오늘은 특별히 더 정확한 발음으로 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가능하면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빵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아침을 준비한 아내가 식사하는 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까?”




운전하며 아내와 같이 본사를 향해 출발하였다. 도착 후 아내는 주변 구경도 하며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혼자 본사가 있는 빌딩 11층으로 올라갔다. 담당 본부장을 만나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본부장님,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나를 맞이한 후 다시 책상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나를 바라보며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곧 무슨 뜻인지를 즉각 알아차리고서는 그의 얼굴을 계속 주시하였다. ‘저 양반, 기어코 한 말씀하시네, ㅋㅋ’ 나는 속으로만 비아냥거리듯 내뱉고 말았다. 순간, 파란 하늘이 가득한 전방의 창문 밖으로 시내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PC에서 소장님 이력서 한 장 출력해서 회장님 방으로 같이 갑시다.“ 그는 잰걸음으로 나를 인도하며 건너편에 있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저만치 안쪽에 앉아있던 회장님이 서서히 걸어서 내 앞에 다가설 즈음 나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미 결정을 내려놓아서인지 회장님과의 면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만, 회장님은 나의 이력서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본부장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이력서가 회사 양식과 좀 다르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악수를 청하더니 열심히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임명장을 보니 부임일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날짜로 기재돼 있었다. ‘드디어 발령장을 받는구나!’ 만감이 교차하고 감개무량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부임일에 상관하지 않고 오후에 바로 관리사무소로 달려가서 직원들을 만났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고, 직원들과도 빨리 얼굴을 익혀야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경력 21년 차라고 자신을 소개한 관리과장은 자기도 불과 2주 전에 새로 왔다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옆 눈짓으로 슬그머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심하게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약간 신경이 거슬렸다. 기전직 직원들과 경리, 서무를 담당하는 여직원들도 그 자리에서 같이 보며 첫인사를 나눴다. 일일이 눈동자를 마주치며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직원들이 자주 바뀌었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1년 이상 근무한 사람이 두세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략 짐작할 만했다. 언제 여기서 그만둘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표정들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사람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전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문제와 기회는 동전의 앞뒷면이나 다름이 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 만큼 그 어느 자리도 결코 만만한 곳은 없다. 나 역시 그런 자리에 온 것이다.




이 바닥은 첫발을 들여놓기가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 수 없이 많이 보았던 구인정보들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실무경력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며 그 조건을 빠뜨리지 않고 내걸어 놓고 있다. 자격은 취득하였더라도 아무런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써주지 않는 것이 업계의 오랜 관행이다. 엄청난 진입 장벽이다. 시험으로 전문가 자격을 딴 사람들이 이런 불합리한 장벽 앞에 절망하고, 해마다 늘어나는 유자격자의 수를 보며 초조해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쓰는 주택단지에서는 기왕이면 경험 많고 노련한 사람을 원하겠지만, 법은 그렇게 하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 주택관리사도 변호사나 회계사, 기술사처럼 분야의 전문가로서 당당히 일할 수 있도록 터무니없는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나이 60세로 정년퇴직하도록 산전수전 겪으며 직장 경험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실무경험이 필수여야 하는지 묻고 싶다. 초임 검사가 비록 나이는 어리더라도 반드시 실무경험이 있어야 직을 수행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유독 주택관리업은 왜, 언제부터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이토록 크게 벌어졌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이것은 주택관리업이 국내에 도입된 역사에 비하여 경영이나 서비스는 여전히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안주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혁신의 여지가 참 많은 분야다. 이른바 '실무경험' 없이 이제 막 현장에 발을 내디딘 초보로서 벤처 하는 마음으로 이 바닥의 생리와 메카니즘을 파헤쳐볼 생각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만 보고 무작정 뛰어들다가 무참히 타죽는 불나비 신세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단물 빠지면 그냥 내뱉는 껌 같은 존재, 실컷 피다 냅다 버리는 담배꽁초 처럼 하찮은 인간으로 취급받아서도 안 된다. 언제든 쓰고 버리는 부실기업의 부품 마냥 생각없이 전전해서는 썩어빠진 세상에 어떠한 변화도 가할 수 없다. 혁신의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주택관리 시장은 그런 면에서 가슴뛰게 하는 블루오션(blue ocean)이다.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 네이버의 이해진, 카카오의 김범수 처럼 '판'을 뒤집어놓을 만한 린치핀(linchpin)이 무엇인지 묵묵히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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