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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U Aug 17. 2020

고대 도시 타라고나에서 추억의 게임을 하게 될 줄이야

15일간 서른 도시, 서유럽 대륙을 횡단한 두 남자의 여행기 #13

상이 형을 한국으로 먼저 보내고 초이 형과 단 둘이서 넓은 푸조 308에 올라타자 허전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은 아직 많이 남았다. 초이 형은 시동을 걸고 다시 말타네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말타가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재밌게 스페인 여행을 하고 있다며 감사의 선물을 준비하자고 했다. 초이 형은 꽃 선물을 제안했고 우리는 구글 지도에서 가까운 꽃집을 찾아 그 곳으로 이동했다.


아기자기했던 꽃집은 여기저기 다양한 꽃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입구부터 꽃향기가 풍겼다. 향긋한 꽃 내음새를 맡고 찾아온 건 우리만 아니라 벌과 나비들이 드나들었다. 뜨거운 스페인 햇살 아래서도 꽃집만큼은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꽃집 주인을 만나자 마자 꽃선물을 할 거라며 하얀색 꽃들로 다발을 만들기 원했다. 그리고 꽃집 주인은 정확히 주문을 접수하여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백장미를 중심으로 쑥부쟁이, 영국장미, 안개꽃을 한 데 모아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꽃다발을 사 들고 다시 말타네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말타는 역시 맨발로 나왔는데, 초이 형이 꽃다발을 건내 주자 놀라면서도 이내 정말 좋아했다. 말타는 마침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우리가 선물한 꽃다발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말타는 정말 고맙다며 꼭 꽃병에 꽂아 놓겠다고 했다.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선물을 준비한 우리가 배로 기뻤다.


꽃다발은 잠시 내려놓고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말타는 뒷마당 베란다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베란다 내 식탁 위로 식탁보를 깔고 주방을 넘나들며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메뉴는 호박죽과 감자샐러드, 그리고 체리 한 바구니였다. 비록 고기가 없는 식사였지만, 먹으면서도 매우 신선하고 건강한 식사라고 느꼈다. 뒷마당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베란다 그늘 아래서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 즈음에 외출하셨던 말타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말타의 어머니도 식사를 하고 오셔서 우리는 그대로 테이블을 치우면 됐다.

자, 이제 네 사람이 모였으니 보드게임이 펼쳐졌다. 추억의 게임,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나만 모르는 게임이었지만, 다들 정말 오랜만에 이 게임을 해본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초보자였으니 게임 룰을 물어봐도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게임을 하면서 배우기로 했다. 내가 검정색 말, 초이 형이 노란색 말, 말타의 어머니가 빨간색 말, 말타가 하얀색 말 순으로 게임이 진행됐다. ‘다이아몬드 게임’ 자체를 처음 해보던 나는 게임 초반에는 실수가 연발이었지만 점점 게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머리를 써야하는 전략 게임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차례를 헷갈리거나 이동방향을 헷갈리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실수가 이 게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요소였다. 결국 나는 차례의 차례를 거듭하면서 10개의 말 중 7개의 말을 골에 넣고 3개의 말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어느새 말타가 모든 말을 골에 넣고서 게임에서 우승해 버렸다.


우리는 즐거운 게임을 마치고 집을 나서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근교인 타라고나로 놀러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근교인만큼 시체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우리의 푸조 308이면 1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 3시쯤 출발한 우리는 오후 4시 언저리에 타라고나를 방문했다. 지중해 해변이 잘 보이는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타라고나 원형 경기장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Casa de La Sang’ 성당이 위치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성당 앞에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개조된 ‘Pretori 타워’가 있었는데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져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타라고나가 유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유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고, 이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단지 ‘Pretori 타워’ 뿐 아니라, 타라고나를 구성하고 있는 구시가지 전체가 말이다. 때문에 타라고나는 어디를 방문해도 로마의 숨결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데, 우리가 첫 번째로 방문한 Pretori 타워는 또 다른 매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계단을 따라 타워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면 타라고나 해변가에 위치한 로마 원형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푸르른 지중해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바르셀로나 근교에서 로마 문화와 지중해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이 곳 타라고나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골목을 따라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구시가지 꼭대기에 오르면 타라고나에서 가장 유명한 ‘타라고나 대성당’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현재도 어색함이 없는 로마 도시에 놀라면서도 구시가지 꼭대기 계단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라고나 대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아는 성당들처럼 드높은 첨탑을 가진 구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우아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성당 안쪽으로는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고 성당이 사방을 둘러싼 형태를 가지고 있어 실제로도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우리는 성당 외곽을 따라 구시가지를 관광했다.


그러다 구시가지 아래에 위치한 유네스코 공원의 원형 도로로 빠져나왔다. 마침 그 곳에서는 도로 위를 달리는 열차가 운행 중이었다. 기관사에게 1인당 6유로를 지불하면 타라고나 대성당부터 지중해 해변 인근까지 한바퀴를 도는 1시간짜리 관광코스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기관사가 나눠주는 이어폰을 열차 이어폰 잭에 꽂으면 영어로 된 안내 설명이 들렸다. 물론 영어가 젬병이었던 나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기능이었으나, 열차 그늘 밑에서 더위를 피하고 편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었다. 그렇게 구시가지 관광을 풀코스로 마치자 저녁 7시부터 행사가 이어졌다.


마침 카탈루냐는 전통 행사가 있던 날이었는데 남녀노소 손을 맞잡고 구시가지를 둘러싼 다음 지중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행사였다. 이 춤은 ‘사르다네스’라는 전체 전통춤으로 타라고나 행사는 약 7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우리는 대성당 앞에 위치한 ‘Casa Baleells’라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티와 콜라를 주문한 뒤 행사를 관람했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손을 이어 잡고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매우 단순한 스텝이었지만 다들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스텝을 맞췄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공동체가 만들어낸 평화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30분가량 이어진 사르다네스는 다같이 큰 구호를 외치며 밝은 웃음소리와 함께 끝마쳤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을 찾으러 신시가지로 향했다. 구시가지 인근에 세워 두었던 푸조 308을 몰고 신시가지 실내주차장으로 옮겼다. 신시가지는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부둣가로 커다란 야자수와 분수대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부두를 따라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또한 축제일인만큼 구시가지 뿐 아니라 신시가지에서도 행사가 이어졌다. 부둣가에서는 퍼레이드와 함께 정말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는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지역 학생들로 구성된 타악기 부대들이 나타났다. 두 부대는 선두에 각기 다른 인형을 이끌고 나타났고, 한 가운데서 만난 두 부대의 선봉들이 싸우는 그림이 연출됐다. 바이킹과 용이 싸우는 장면이 폭죽과 함께 화려하게 그려지면서 마지막엔 악마를 불로 태워버리는 의식을 행했다. 이 날 카탈루냐 사람들은 폭죽을 터트리면서 악을 쫓고 물리치는 의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퍼레이드 또한 그런 의미였다. 퍼레이드는 긴 시간을 차지하지 않았다. 정말 굵고 짧게 한방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좋은 구경을 마쳤으니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식당들은 분수와 야자수, 그리고 요트들이 정박된 부둣가를 마주보고 줄지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L’Ancora del Serrallo’이라는 해산물 전문점을 찾았다. 이제껏 지중해 인근 도시를 다녔지만 제대로 된 해산물 요리를 먹지 못했기에 이번만큼은 상당히 기대가 됐다. 우리는 부둣가가 잘 보이는 식당 건너편 테라스에 앉아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요리 메뉴만 100여 가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메뉴판을 열심히 보면서 먹고 싶은 메뉴를 신중하게 골랐다. 아니, 먹고 싶은 메뉴는 모두 시켰다고 하는 게 맞겠다.  주문했던 메뉴들을 다시 되돌아보면 홍합찜, 고추찜, 오징어튀김, 아티초크찜, 정어리구이, 감바스를 먹고도 디저트로 파인애플 구이를 시켰다. 우리가 주문했던 메뉴는 총 7가지였다. 특히, 나와 초이 형은 저녁 8시가 넘도록 밥을 굶고 있었으니 한국인의 배꼽 기준에선 상당히 배가 고픈 시간이었다. 나는 칼칼했던 홍합찜과 간간한 감바스를 맘에 들어 했고, 초이 형은 레몬즙을 더한 정어리구이를 맘에 들어 했다. 초이 형은 맛 들린 정어리구이를 포크와 나이프로 뼈를 바르는 게 번거롭다며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정말 정어리구이를 제대로 먹는 방법 같아 보기 좋았다.

거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어쩌다 젓가락 게임을 하게 됐는데 말타는 전혀 모르는 게임이라고 했다. 말타에게 덧셈, 뺄셈만 할 줄 알면 쉬운 게임이라며 룰을 가르쳐주고 초이 형과 일 대 일 대결이 펼쳐졌다. 우리는 워낙 어릴 때부터 해왔던 게임이었기에 초이 형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말타는 자신의 손가락과 초이 형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집중했다. 그러나 초심자인 말타가 초이 형을 이길 리 난무했다. 초이 형은 이길 때마다 껄껄거리며 웃었으며, 말타는 “Oh, No!”를 외치며 좌절했다. 아무리 재도전해도 말타가 초이 형을 이기지 못했는데 마지막 게임만큼은 말타가 이기는 쾌감을 맛보았다. 아마 초이 형이 말타를 생각해서 일부러 져줬다는 기분을 지금까지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날만큼 즐거운 저녁 식사는 손에 꼽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말타와 많이 친해졌고 여행을 함께하는 또다른 동료였다. 타라고나 여행을 마치고 말타네 집으로 돌아왔다. 나와 초이 형은 다음날이면 바르셀로나와 시체스를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말타와도 작별을 해야 했다.


종종 여행은 잔인하다. 내게 익숙했던 생활권을 떠나 낯선 환경 속에서 던져지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 속에서 낯선 친구를 만나지만 서로가 가진 배경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같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하고 배려한다. 그리고 ‘정’이라는 감정이 생겨버린다. 그러나 여행은 정든 친구를 만났던 낯선 환경마저 떠나야하는 것. 결국 그 친구와의 이별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은 포기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낯선 환경인만큼 짧지만 어떤 편견도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이 풍성해져서 서로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는 일이다. 비록 정든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추억은 반드시 남는 법이다. 그래서 더욱 여행을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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