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간 서른 도시, 서유럽 대륙을 횡단한 두 남자의 여행기 #15
테라스 창문 너머로 따사로운 햇살과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침을 알려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전날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어 있었던 피부를 진정시켜 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한국의 마스크 팩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 아니던가. 나와 초이 형은 물론 말타까지 새하얀 마스크 팩을 뒤집어쓰고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마스크 팩을 마치고 나면 숙소를 체크아웃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는 ‘지로나’였다. 사실 지리적으로 본다면 바르셀로나에서 피게레스까지 오는 길에 지로나가 위치해 있다. 피게레스까지 온 지금 지로나로 향한다는 것은 여행 경로를 역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로나를 빼놓고 여행할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 근교의 스페인 남부 도시인 지로나는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촬영지로 유명한 도시로, 역사만 1,000년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신시가지에 푸조 308을 세워 두고 구시가지로 가기 위해 지로나를 가로지르는 ‘오냐르 강’을 건넜다. 오냐르 강 위로 설치된 빨간 철 구조물 다리를 건넜는데, 이 다리 이름은 ‘에펠다리’였다. 여기서 에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스타브 에펠’의 에펠이 맞다. 프랑스 건축가이자 파리 에펠탑을 설계했다는 귀스타브 에펠이 지로나의 붉은 다리도 설계했다. 다리의 격자 구조 사이로 보이는 오냐르 강과 알록달록한 마을의 풍경은 지로나를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이다. 특히, 북쪽에서 구시가지 방향을 바라보면 높이 우뚝 솟아 있는 지로나 대성당이 보인다. 우리가 곧 방문하게 될 명소가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점심시간이 다다르도록 공복 상태였기에 식사가 시급했다. 구시가지에서 에펠다리와 멀지 않은 ‘Greens’라는 카페를 방문했다. 무려 작년에 오픈한 카페였기 때문에 다른 카페들보다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우리는 이 곳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고 다양한 메뉴들을 주문했다. 하몽과 과카몰리가 각각 올라간 타파스를 비롯하여 말차 볼, 홍차, 과일 밀크셰이크 등을 시켜 브런치로 즐겼다. 대부분 생과일과 신선한 재료들이었기에 먹는 내내 건강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너무 시간이 늦지 않게 지로나 대성당에 오르기로 했다.
1,000년도 넘은 도시의 구시가지는 그에 걸맞게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그때의 모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었다. 가는 길목마다 유럽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1,00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 중인 우리에겐 어느 골목을 가더라도 아름다운 사진 배경의 포인트였다. 지로나 대성당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시계탑이었다. 성당의 정면은 아니지만 아까 지나왔던 에펠다리에서 보이던 성당의 모습도 바로 시계탑이 있는 측면이었다. 성당 시계탑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마침내 성당의 정문도 만날 수 있다. 정문 반대편에 지로나에서 성당으로 올라오는 큰 계단과 광장이 펼쳐져 있으며, 성당 정문에는 6명의 성자들이 조각상이 되어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밤낮없이 지로나 대성당의 정문을 각자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6명의 성자들은 어딘가 모르게 위엄이 느껴진다.
이들을 뒤로한 채 성당 안으로 들어서도 볼거리는 풍성하다. 성당은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성경의 일부분을 그린 회화부터 금과 보석들로 꾸며진 장신구까지 고전적인 화려함을 자랑한다. 게다가 어두컴컴한 예배당은 작은 램프들만 제외하면 오직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무엇보다 성당의 존엄함을 더하고 있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넓은 고딕 양식의 신도석을 가진 성당인만큼 넓은 내부에서 느껴지는 웅장함도 있었다. 예배당을 지나 성당 안쪽에는 성당의 정원과 우물을 만나볼 수 있다. 정원 한 가운데 우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물의 북서쪽으로 나무 한 그루만이 위치할 뿐이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온 우리는 성당에서 멀지 않은 ‘아랍인의 목욕탕’이라는 명소로 향했다.
지로나 대성당 후문 방향으로 나와도 성당을 다시 우회할 수 있는 산책로가 하나 있었는데 잘 다듬어진 돌계단과 푸른 녹지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그 길을 바르게 쫓아가면 우리가 가고자 했던 ‘아랍인의 목욕탕’을 바로 만나볼 수 있다. 과거 아랍인들이 목욕을 했다던 터키식 목욕탕을 직접 볼 수 있다. 내부는 총 5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가운데 자리한 팔각형 욕조이다. 욕조 위로는 6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오로지 욕조 위로만 바깥의 빛이 들어온다. 조그마한 역사적 명소이기 때문에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관람한다면 1,000년 전 아랍인들의 정수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로나에서 상당히 유명한 명소로 소문나 있어 대부분의 가이드들이 많은 관광객들을 대동하여 이 곳을 찾는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목욕탕의 크기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요하고 차분한 목욕탕의 분위기와 달리 떠들썩한 분위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아랍인의 목욕탕’을 마지막으로 지로나 여행을 마쳤다.
초이 형과 나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향해야 했고, 말타는 시체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돌아갈 말타를 지로나역에 내려주면서 헤어졌다. 스페인 여행 내내 함께 여행했던 동료였기에 이렇게 헤어진다는 건 매우 섭섭했지만, 함께 좋은 추억을 쌓고 즐거운 여행을 했기에 누구보다 밝게 인사하며 각자의 내일에 행운을 빌었다.
여기서부터 군대 선후임 사이인 초이 형과 나, 두 남자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더 이상 상이 형도 말타도 없었다. 우리의 푸조 308은 지로나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피게레스를 다시 지나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을 향해 달렸다. 네비게이션에서 국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육로로 국경을 넘어간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경험하기 위해 창밖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국경을 넘었음에도 고속도로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경을 넘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순간 ‘이게 국경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고속도로 왼쪽에 세워져 있던 관공서 위로 휘날리는 프랑스 국기를 보았다. 그제서야 프랑스에 도착했음을 손톱만큼 실감했다.
그렇다고 국경을 무사 통과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평범한 경우엔 별다른 제제없이 통과할 수 있는 국경이자 고속도로였는데, 어째서인지 우리는 국경 앞 프랑스 경찰에게 정지 신호를 받았다. 초이 형과 나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권 제시 요구에 군말없이 두 여권을 넘겨줬다. 그러자 프랑스 경찰은 우리의 여권을 받고 수상쩍게 여기더니 위조 검사까지 했다. ‘대한민국 여권이 위조라니?’ 나름 우리나라 여권은 세계적으로 위상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마 우리가 검사를 받았던 이유는 차량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이 형이 빌린 푸조 308은 붉은 색 번호판을 달고 있었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번호판 색상이었다. 거기다 검은 머리의 두 동양인이 타고 있었으니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다. 오히려 프랑스 경찰 입장에서 평소와 다른 이상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여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이내 여권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사이에 맞닿아 있는 프랑스 도시 ‘페르피냥’으로 향했다.
페르피냥에 들어서자 지난 6일간 보았던 스페인과 다른 느낌의 풍경이 펼쳐졌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느낌이었다. 이 사소한 차이를 무어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스페인과 프랑스는 도시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국경을 넘어 다른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화적 차이를 느끼는 일이다. 정말 몸소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게다가 초이 형도 의기양양 해졌다. 프랑스 유학 4년차인 초이 형이 드디어 프랑스에 입성했으니 자신 있게 여행을 주도해 줄 수 있었다. 초이 형은 내게 “여기서부터 다 맡겨”라고 말했다.
우리가 페르피냥에서 가볼 곳은 ‘마요르카 왕국의 성’이었다. 과거 마요르카 왕국의 근거지였으며 현재 페르피냥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유학생인 초이 형의 도움을 받아 학생할인 요금인 2유로만으로 성에 입장할 수 있었다. 별다른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지 않고 단지 건축물만 남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내부 구경보다 전망대에 오르는 일이 더욱 매력 있는 장소였다. 전망대에 오르면 페르피냥 전경은 물론 피레네 산맥의 설산까지 보인다. 운이 좋아 날씨가 따라준다면 지중해까지 보일 기세였다. 가히 페르피냥을 대표하는 성이라고 할 만했다. 온 페르피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야 말로 페르피냥의 근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만약 페르피냥에 가게 된다면 마요르카 왕국의 성 전망대는 반드시 가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