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간 서른 도시, 서유럽 대륙을 횡단한 두 남자의 여행기 #22
초이 형과 나는 프랑스 니스에서 첫 여행지였던 샤갈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이미 시간은 저녁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마침 숙소는 니스 해변 인근이었기에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에 푸조 308을 주차했다. 우리는 짐을 챙겨 니스 해안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좌측으로 드넓은 니스 만이 펼쳐졌고, 하늘 위로 니스 공항을 오가는 비행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니스 해변에 도착했을 때에 다시 한번 니스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커다란 니스 해변과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관광객들을 보며 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니스라는 걸 느꼈다. 당장에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굶주린 배가 꼬르륵거리며 식사 시간을 알려왔다.
우리는 마땅한 식당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네이버 카페 <유랑>에서 우연히 동행을 구하게 되어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니스 해변 인근의 이탈리아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그 곳으로 향했다. 두 분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 니스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여행자는 원이 씨와 윤이 씨였다. 한 분은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또 한 분은 모스크바에서 교환 학생 생활을 하다가 프랑스 남부 니스까지 여행을 오게 됐다고 했다. 마침 이십 대 초반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유난히 친해 보였기에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그런데 웬걸? 그들은 니스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다. 초이 형과 나는 어제 오늘 만난 사이에 그렇게 친해질 수 있냐고 놀라움을 표현했는데, 그들도 서로 너무 잘 맞아서 놀라는 중이라고 했다.
이럴 때 보면 여행은 참 신기한 것이다. 서로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평생 존재를 모르고 살 수도 있는데, 여행이라는 계기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된다. 개중에는 원이 씨와 윤이 씨처럼 잠깐 만나도 서로 잘 맞는 사이도 있다. 여행이 주는 뜻밖에 선물인 셈이다. 특히, 초이 형과 나에겐 두 사람은 조금 어린 동생들이었다. 초이 형과 나도 처음 만난 게 두 사람과 비슷한 이십 대 초반이었고,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었던 때였다. 비록 그들처럼 낭만적인 프랑스 니스는 아니었지만, 각박한 군생활 속에서도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초이 형은 내게 후임이었지만 항상 배울 게 많은 형이라고 생각했고, 초이 형은 내가 비록 나이 어린 선임이었지만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관계가 1년이 되고 2년이 되어 어느새 6년째 이어져 오면서 현재 프랑스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또 그렇게 4명이서 만난 것도 신기한 인연이라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생활 방식도, 생각하는 사고 방식도 조금씩 다른 네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각자가 살아온 세상,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나갔다. 그러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 초년생이라는 공통점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물론 그렇게 우울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기 위해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음식들을 주문했다. 프랑스 유학생이 둘이나 있었으니 파스타 두 접시, 피자 두 판, 맥주 네 잔은 손쉽게 주문할 수 있었다. 비록 이탈리아 음식이었지만,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 먹는 이탈리아 음식도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확실히 스페인과 비교해서 프랑스에서 먹는 음식들은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그에 걸맞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들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도 지난 여행의 추억들과 앞으로의 여행 스케줄을 공유했다. 초이 형과 나는 이제 막 니스에 도착한 참이어서 내일은 에제 빌리지와 모나코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마침 원이 씨와 윤이 씨는 내일도 니스에 머물 예정이었는데 별 다른 계획이 없어서 우리 여행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시간 30분가량의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내일 아침 니스역 앞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초이 형과 나는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캐리어 등 무거운 짐들을 어서 숙소에 맡기고 니스 해변으로 나가고 싶었다. 식사를 했던 식당을 뒤돌아 니스 시장으로 들어섰고, 골목 사이를 누비며 숙소를 겨우 찾아 길을 향했다. 좁은 골목에 위치했던 숙소는 좁은 계단마저 올라야 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 차 있어 보헤미안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정집에 도착했다. 호스트인 아주머니는 이 집에 혼자 사시면서 다락방을 숙소로 내주고 있었다. 비록 혼자 사시는 분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포근했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호스트는 우리가 묵게 될 다락방과 숙소 이용의 안내를 도와줬다. 저녁도 챙겨 먹었고 숙소 체크인도 마쳤으니 한결 가벼워진 우리는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아쉬워 해변으로 나가기로 했다.
마침 니스는 저녁노을로 가득 물들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붉어졌고, 길거리는 야자수와 가로등 불빛으로 채워졌다. 해변에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하루 종일 더위에 지쳐 있었으니 바다에 뛰어들었다. 사실 저녁쯤 되자 바닷물은 찬기가 느껴졌다. 초이 형은 하얀 셔츠를 걸친 채 뛰어들지 못하고 발만 담갔다가 기어 나왔다. 오히려 이럴 때 오기가 발동하는 나는 과감하게 상의를 탈의하고 바다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앞으로 길게 뻗은 팔과 함께 머리부터 바다로 입수했다. 바다 속에서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 나는 마치 청춘 영화처럼 머리를 털고 물 밖으로 나왔다. 몸은 그대로 물에 담근 채 말이다. 바다의 찬기 따위는 잠시만 참으면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 줄 시원함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원없이 수영을 마친 초이 형과 나는 니스 해변으로 찾아오는 밤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니스 만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이 곳에서는 ‘#I Love NICE’라는 조형물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는 게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딱히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개인 소장을 위해서 사진을 찍어 보기로 했다. 비록 내가 입었던 검은 티셔츠 위로는 ‘NYC’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내 키보다 두 배는 큰 니스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나는 어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컨디션이 상당히 나쁜 상태였다. 이미 스페인에서부터 감기 증상이 있었는데 니스에서는 몸살이 심하게 났다. 물론 너무 더운 날씨에 해수욕을 하지 않고서 버틸 수 없어 바닷물에 몇 번이고 뛰어들었지만 니스에서 컨디션은 가장 최악을 기록했다. 게다가 열대야로 인해 숙소는 매우 더웠다. 에어컨 설치가 법적으로 어려운 프랑스는 선풍기 한 대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더위를 버텨야 했다. 나 역시 해열제를 먹긴 했지만 푹 자기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이 형은 내가 혼자서 푹 잘 수 있도록 잠시 니스 밤거리를 배회하러 나갔고, 나도 푹 쉬고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아파서 정신이 몽롱했던 것인지 약기운에 몽롱했던 것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 와중에 위로가 됐던 게 숙소 호스트가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였다.
고양이의 이름은 ‘릴리’였는데 릴리는 어느 새 다락방에 들어와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물론 처음엔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릴리를 귀여워했고 관심 받고 싶어 했다. 어차피 더워서 잠은 오지 않는데 릴리라도 나를 놀아준다면 기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조심스레 조금씩 쓰다듬어주니 금방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눈을 맞추기만 하던 릴리는 점차 내게 다가오더니 어느 새 내 옆자리에 누웠다. 그러면서도 내게 무관심한 척했다. 순간 릴리가 츤데레처럼 느껴졌다. 나를 거들떠도 안보면서 쓰다듬어줬으면 하는 부위는 대놓고 밀어 보였다. 나도 그런 눈치는 있었기에 릴리가 원하는 대로 스킨십을 취했다. 녀석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이제는 대놓고 내 무릎 위에 누워 나를 열심히 쳐다봐 주었다. 릴리의 눈빛에서는 “이봐, 인간 어서 배를 만지지 않고 무얼 하는 거냥?”이라는 의사표현이 느껴졌다. 물론 나도 감촉이 좋았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릴리와 노는 사이에 나는 차분해졌고 여전히 아프다고 느꼈지만 편안했다.
그러는 사이에 초이 형도 숙소로 돌아왔는데 내일 일정을 위해 어서 잠들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있었을 때였을까? 릴리는 잠도 없는지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릴리랑 너무 잘 놀아준 탓이었는지 녀석은 잠들어 있는 나의 옆구리를 쿡쿡 눌렀다. 그 작고 귀여운 앞발로 말이다. 귀엽긴 했지만 꽤 잠들어 있었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초이 형은 내가 푹 잠들 수 있도록 릴리를 끌어안아 데려가 버렸다. 나도 그대로 다시 잠들었는데 이후 다음 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 행선지인 에제 빌리지와 모나코로 향할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