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한 톨을 쓰다
낡은 것은 좋아하지만 진부한 것은 싫다. 뻔한 낱말 늘어놓기를 싫어해서 글 쓰는 게 두렵곤 했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 낸 과거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을 좋아하여, 꺼내보았을 때에 그것들이 결코 우스워 보인 적은 없었다. 과거의 나는 꽤 빛나고, 대단해보이기까지 할 때도 있다. 진짜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들은 종종 그렇게 느껴지곤 한다. 그렇기에 '꾸준히'를 늘 갈망한다. 돌아볼 때 마다 대단한 것들을 아직도 하고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일지를 꿈꾼다. 단 한 번도 쉬워지질 않지만.
최근에 2년 만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주변에 비하면 꽤 오랜만에 다녀 온 것이지만 낯설지 않은 까닭은, 2년 사이에 국내를 바지런히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직업도 없는 내가 장거리 연애를 위해 무궁화호를 타고 한국 반대편 땅 끝까지 다달이 왕복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구분하지 못할 즈음까지 잔뜩 지쳐가다, 겨우 정신 차렸을 때엔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해가 바뀌기 직전이었다. 1년 전,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했었다. 스물 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물 셋이 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무궁화호를 타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애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뭐랄까, 턱까지 잠기는 물에 빠져 그 안에서 열심히 헤엄을 쳤다. 까치발을 들면 헤엄치지 않더라도 코로 숨 정도는 쉴 수 있는 깊이이지만, 목은 항상 전부 잠겨있어 숨은 늘 매우 가쁜, 그런 정도의 그림을 그려왔던 것 같다.
요새 슬슬 볕이 좋아지고 있다. 지난 이맘때에도 좋아했던, 멍멍이와 산책하며 맡았던 공기를 여전히 그대로 가슴 벅차게 좋아하며 다시 필 벚꽃들을 기대한다. 참 좋아하는 것이고, 지금은 행복하지만, 내년 봄은 조금 다른 풍경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 욕심이 있다. 그래서 글을 다시 쓰기로 했다. 조금 더 깊은 물에 잠길 각오를 한다. 비루한 한 톨일지라도, 쌓이리라 믿겠다. (2018.03.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