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ping hand
Helping hand
감원(해고라는 단어의 어감보다 훨씬 순한 맛이다)당한 그날 집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4살 된 첫째 딸아이를 안아주고, 만삭인 채 이미 퇴근해 와 집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내에게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인사를 건네며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몰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전 직장 상사였던 피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터는 내 첫 직장에서 만난 직속 상사였지만, 그의 아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내게 관심을 많이 주었고 우리는 꽤 친하게 되었다. 첫 직장 이후에도 인연을 이어갔고 그는 내 멘토이자 친구로서 미국에서 정착하고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당시 피터는 직장에서 독립해 웹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늘 벌어진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만약 프리랜서를 구한다면 내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I'm so sorry to hear that, Lumen. Don't worry, you'll be alright. And actually, I can give you a job. Please come down to visit me tomorrow." 피터의 이 말이 내게는 큰 위로와 안도감을 주었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내 멘털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시간이 갈수록 절실히 느낀다. 나는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인생의 미덕으로 여겼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조금이나 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아내와 함께 출근 준비를 하고 차로 이동해 딸을 데이케어에 데려다주었다. 그곳에서 아내는 차를 운전해 뉴저지 직장으로 출근하고, 나는 데이케어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맨해튼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일상의 루틴처럼 보였지만, 내 마음속에는 감정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IMF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내 가족이 국가부도 위기 사태에서 직격탄을 맞는 것을 태평양 건너편에서 목격하고 더욱더 안정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경제적인 지원을 받던 유학생 신분에서 어쩔 수 없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직장인 신분으로 전환되면서 내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
1997년 6월,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생에게 주어지는 1년짜리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취업 신청을 통해 직장을 찾아다녔다.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경제 상황이 매우 안 좋았고 (매일 한국 기업들이 도산하는 뉴스가 기사로 나왔다), 이왕이면 젊었을 때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국에서 내가 원하는 직장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 전부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학교 직업 게시판에 나오는 Job opening마다 지원하고 작은 인턴쉽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었다. 졸업 후에는 내가 뉴욕에서 취직하고 싶은 회사들 리스트를 만들어 직접 회사를 방문하여 나의 hard copy 이력서를 로비의 직원이나 Security에게 HR부서로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2개월 동안의 노력 끝에 정말 운 좋게 처음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첫 직장의 취업 스토리는 후에 다시 하기로 하자) 그러나 국가부도 위기 상황에서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나고, 그러 인해 병을 얻으셨다. IMF 사태는 아버지가 평생 일궈놓은 회사를 몇 달 만에 '부도'라는 단어로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많은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 감사한 것은 IMF가 발생한 해 (운 좋게) 졸업하고 바로 미국 굴지의 미디어 회사에 취직해서 부모님께 큰 기쁨과 위로를 드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IMF 때 얻은 병으로 고생하시다 2001년에 돌아가셨지만, 병 중에서도 내가 미국에서 취직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다. 내가 태어나서 아버지께 해드린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젊은 나이(57세)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많이 그립다.
피터의 에이전시는 로우 맨해튼 트라이베카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악센트를 가지고 폴 매카트니 눈매를 닮은 이 매력적인 친구는 실력뿐만 아니라 사업 수완도 좋았기에 굵직한 클라이언트도 많았다. 일이 끊이질 않았고 따라서 실력 좋은 디자이너들은 항상 필요했다. 물론 실력과 경력이 출중한 디자이너들 또한 뉴욕 거리에는 넘쳐났기에 네트워크가 없으면 좋은 Job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피트는 진행 중이던 American Express Card 모바일 앱 관련 기획 업무를 약 2개월간 맡아달라고 했고, 시급도 이전 회사 연봉 수준으로 맞춰주었다. 이 업무 덕분에 당분간 출근해야 할 장소(매일은 아니지만)와 소득이 생기게 되어 내게는 상당한 안정감과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고, 아내에게 회사에서 잘렸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피터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회사에서 잘렸다는 소식과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얘기를 털어놓으며, 오히려 이 기회가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 있게 말을 했다. 게다가 프리랜싱의 소득과 실업급여까지 추가하면 이전 직장 연봉과 비슷하여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고, 여유를 가지고 next Job을 찾다 보면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하면서 아내를 안심시키려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는 이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그게 오빠 말처럼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라며 희망과 불안이 섞인 톤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 때로부터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 한 이래로 가장 긴 Jobless의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