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월터 화이트. 고등학교 화학선생이며, 유능하며, 가족을 사랑하고 아낀다.
선생월급으로는 빠듯한 가계경제를 위해 퇴근 후 알바까지 하는 성실한 가장이다,
하지만 폐암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고, 가족들에게 돈을 남겨주기 위해 마약을 제조해서
떼돈은 벌기 시작하고, 어둠과 악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서서히 그쪽세계에 적응 하기 시작한다.
월터가 두 개의 얼굴로 자신의 멘털을 지킬 수 있는 힘은 가족의 따뜻한 사랑 때문이다.
아마 그가 가족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나 가족을 향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정당성이나 동정 심 그에 대한 연민을 시쳥자들로부터 받지 못했을 것이다.
시즌 2 3회까지 보고서 리뷰를 쓸 결심을 한 이유는 너무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스토리지만
드라마의 공식에 딱 결려 들어서 뭔가 기만당하는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드라마를 안 볼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드라마를 모두 볼 것이다. 월터가 어떻게 악당으로 거듭나며 마지막 월터가 느끼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월터는 언젠가 곧 죽게 될 것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은 남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될지도 기대된다.
그는 가족의 사랑 앞에서 가끔은 자신의 행위에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만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그 어떤 힘을 자신이 선택한 악행에서 경험한다.
보통 한국드라마는 긴 시즌을 이어가지 않기 때문에, 사건사고의 갈등의 클라이맥스의 연속이 계속이어지지는 않는다.
브레이킹 배드의 시즌1에서 월터가 만나게 되는 악당은 아주 피라미들 속에 속한다.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악당들은 엄청난 거물들도 있을 것이다.
월터와 그의 옛 제자 제시는 모두 천성은 착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 못 죽이는 그런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처음 순도 99.1프로의 최상질의 마약을 제조해서, 마약거래를 처음 시작할 때
그들의 첫 거래 상대의 악당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일삼지만,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첫 살인이 월터와
제시가
자신의 과도한 자기 방어로 인해 공포를 너무 크게 키워서 스스로 과잉방어하기 위해 얼떨결에 일어난다.
이드라마의 성공요인에는 평범한 월터가 나쁜 남자로 거듭나는 그 심리적 변화를 아주 리얼하게 따라가면서
나의 감정이 그대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저런 경우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손에 땀을 쥐고
월터를 응원하게 된다. 자신이 평생 살았던 밝은 세계를 외면하고, 어두운 범죄의 세계로 질주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암 때문에 곧 죽을 텐데.. 뭐 죽음을 초월하면 뭐가 겁나겠어...라는 기대심리가 작동한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나쁜 남자의 동기가
그것은 돈밖에 가족에게 남길 것이 없다는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슬픈 인간상이지만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악을 대면하고, 악당들과의 한판승에서 묘한 쾌감을 경험한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악행을 깨부수어서 완성한의 말처럼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쾌감으로 인해 생에 활력을 느낀다. 한 번도 못 느낀 강열한 성욕으로 아내에게 이질감을 들게 하기도 한다.
그가 시즌 마지막에 모든 악행의 날개를 달고, 어떤 결말을 얻게 될지 상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하지만 기만 당하는 기분을 느낀 이유는 어차피 죽을 인간들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즌5까지 계속 보면서
현실 속에서 짜릿한 쾌감과 긴장감을
아드레날린과 도파민분비를 느끼면서 그 감정 속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첫 번째 의도적인 살인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장밋빛 스토리를 예상하며 가슴이 몽골몽골 했다.
월터는 자신과 경쟁관계의 마약판매자들과의 실랑이를 벌이다, 한 명을 죽이고, 또한 명이 미수에 그치자
그를 지하실에 감금하고, 월터는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
결국 그를 살려주기로 하고, 그와 긴 대화를 한다. 그의 가족이야기, 그의 꿈. 그 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느끼는데.... 월터의 마음과 반대로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게 된다.
우리나라 드라마라면 이런 놈 하나쯤은
훈훈한 인연으로 살려두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다른 입체적인 스토리를 구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는 냉정하고 비정하다. 앞으로의 긴 여정 앞에서 감정의 고조와 긴장감을 위해
사람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인정사정 남기지 않는다.
순조롭게 성사될 것 같은 마약거래가, 언제나 삐끗거리고, 위험이 찾아오는 이유는 딱하나이다. 월터의 나쁜 남자스토리를
완성해 나가기 위해 긴 여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월터는 살아남을 것이고, 악당은 죽을 것인데.. 이 나쁜 놈이 어떻게 죽는지
그것만 감상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이뻔한 전개를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고,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면서
보고 있는 습관을 반복하는 걸 보면, 파브르의 개처럼 참 단순한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주인공이 마약거래로 얼마를 벌게 될지... 얼마큼 강한 인간으로 거듭날지 그런 기대심리도 한몫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플롯은 그런 뻔한 서사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에 명작이라는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월터는 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점점 더 악을 향해 질주하는가이다.
하지만 앞으로 월터가 맞닥뜨릴 악인들은 모두 사회의 음지에 있는 갱스터들이나, 범법자들이다.
이런 이유로 월터를 합리화하기엔 조금은 비겁하다. 이런 이유로 시청자들이 월터를 응원하면서
본다는 것도, 비겁하다. 쓰레기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이상한 결론은
생명의 존엄함을 말살한다. 권력과 부에 가려진 보호된 악은 건들지 못하고,
손쉽게 사회적제도안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손쉽게 사냥하는 도구로 만든다.
월터가 살인을 하고 느끼는 알 수 없는 쾌감은 내 안의 억눌린 악을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를 느낀 것일까?
인간의 본성 속에 억눌린 에너지를 느낀 것일까?
우리가 타고난 고유한 에너지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선을 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샤르트르의 말처럼 그저 세상에 던져졌다. 선과 악이라고 규졍해 놓은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는 그런 세상에 태어났다.
모든 인간은 사랑을 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악한 나는 사랑할 수 없는가!
결코 아니다. 악한 나도 선한나도 모두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자체를 사랑해야지
인간자체만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월터가 자신 안의 악을 경험하는 그런 과정은 그런 생명자체를 느끼는 순간 일수도 있다.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 선과 악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내고, 자유로워지는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월터에게 다가온 바로 그 운명이라는 거대한 태양을 월터는 받아들이고, 운명에 맞선다.
월터는 가족들에게 돈을 남기려고 한다. 비록 그것이 악한 행위로 번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내던져서 죽을 때까지 모르려는 돈 앞에서
세상의 운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월터를 기다릴까?
월터는 그런 운명들을 하나둘 맞닥뜨리면서 어떤 깨달음들을 얻고, 그의 파트너 제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주변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식될지
기대하면서 보게 되는 드라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또 리뷰를 쓰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