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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Nov 20. 2024

트라우마  그 시리고 선한 아름다움(피해자)

복수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자애롭고 현명한 병원장 부모밑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금수저 주여정이 가진 트라우마는  증오로 어찌하지 못하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이다.  모든 의사들이 거부한 자신을 살려준 의사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이코패스.  그때 살해당한 의사 주여정의 아버지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자는 교도소에 수감된 날부터 주여정에게 편지를 쓴다.

 아버지를 죽이던 그날 칼끗에서 느껴지던 그날의  쾌감의 이야기들을 디테일하게 적어서 보낸다.

정기적으로 살인의 순간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주여정에게 적어서 보낸다.  

나는 살인을 했고,  아버지를 잃은 너의 지옥을 나는 교도소에서 즐기고 싶다는

악마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 왜 아버지를 죽였어요?"라고 묻지만 기괴한 웃음만 짓는다.

주여정의 지옥은 사랑하던 아버지가 살해당해 눈앞에서 죽어가던 순간에 머물러 일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법의 심판이 이루어졌지만 살인자는 사회와 격리되었을 뿐

아무런 반성이나  죄책 감 없이 성실하게  무기수로 살아가고 있다.

주여정은 그런 살인자를 죽이고 싶다는 증오와 자기 파괴적 복수심에   정신적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간다.

" 왜 아버지를 죽였어요?"

주여정이 면회를 가서 다시 물었다.

" 모두가 수술을 거부했어요, 팔을 부러져 죽을 만큼 아픈데, 살인마라고 만지기도 싫다고, 모든 의사가

내 수술을 거부했죠. 그때 아버님이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날 수술해 주겠다고 했죠.

그때 말했죠. 아무리 살인자라도 우리는 의사고 우리가 살려서 법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그가 내 눈을  보면서 말했어요.


"누가 여정이 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오늘 저녁같이 먹기로 해서 오는 중일 거야. 그냥 집으로 가라고,

그리고 라면 먹지 말라고.. 개는 라면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몰라."

살인자는 다시 웃으면서 말한다.


" 아니 라면 먹지 말라고? 남은 팔이 아파 죽어 가는데 라면 먹지 말라니... 제 입장에서는 너무 모욕적이지 않나요

아무튼 수술은 잘됐고, 난 팔이 자유로워졌거든요. 그 순간 누가 보고 싶어 졌는지 아세요?

네.  라면 좋아하는 원장 아들이요. 그래서  그랬죠, 메스로 쓰윽 그어서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달려올 테니까요!"

주여정은 그의 대답에  절망한다.


정의라는 법의 복수는 사회라는 격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이지.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 당신을 다 용서했어요"라고 피해자 가족이 찾아가면, " 저는 회개하고, 하느님에게서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하는 화나는 대사는 이미 영화에서 여러 번 보았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법의 심판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고통만 더 늘어날 뿐이다.

어느 날  주여정의 삶을 바꾸는 그런 여자가 나타난다. 자신보다 더 깊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살아가는 여자 송혜교

극 중 문동은이다.   자신의 복수심보다 더 깊고, 암울하며, 처절하며, 고요하고, 냉철하며, 칼날 같은 자비심이라고

1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다 내건 그런 복수를 만난다.  

 복수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웃는 법마저 잊어버린 여자 마치 복수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치밀하고 냉정한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주여정은 잠시 자신의 복수를 잊어버린다.

   그녀의 복수를 돕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의 복수심의 실체를 보게 된다.

문동은의 순도 100프로 복수심 앞에서 자신의 복수는 어설프며 자기 파괴적이고, 충동적이며,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붙들고 있던 트라우마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복수가 끝난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건 아니다.  가장 마지막 가해자인 자기 자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트라우마 뒤에는  가해자라는 제1차 대상이 존재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자연재해든 동물이든 아니면 하나의 사건사고가 되든

중요한 건.  그다음 2차 가해자는 피해자를 대하는 주변인들이고,  그다음 최종 가해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가해근거가 없는 사건사고도 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나뭇가지가 떨어져 두 다리를 잃는다고 하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을 때면, 우리는 그때 그 시간을 지나가야 했던 상황들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그때 내가 거기를 지나가지만 않았어도.... 라면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와 같은 연대를 가진 사람의 공감과 위로 위안은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순간도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영향을 받아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건 일시적일 수 있다.

사랑이라는 치료약은 증상을 완화시켜 줄 뿐이다.  진짜 치유는 자기 자신만이 가능하다.

관심과, 공감, 사랑, 위로의 불씨를 언제나 자신 안에서 꺼지지 않게 유지시킬 힘은 자신의 너그러움과 사랑에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문동은과 주여정은 이타심이 자기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지켜나가데 힘을 실어 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 있어 이타심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고 지나치면,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 사이코패스들은 죄책감이 없다.  그들은 트라우마라는 게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잠도 잘 자고,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낸다.  시체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의 자기애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할 때 강해진다.  이타심은 인간을 나약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성공한 인간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적성향의 인간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강함 때문이다.

이런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해치우는 강함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본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동물들처럼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산다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남을 위하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는다. 지나친 이타심은 때로 자기 파괴를 불러오기도 한다.

문동은의 이타심은 자신과 같은 학폭피해자이면서, 같은 가해자에게서 죽임을 당한 소희라는 친구의 복수를 결심하면서부터였다.


문동은의 증오는 자기 파괴적이었다. 동은이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가해자를 증오하지만,  타인에게 아무런 폭행을 하지 못하는

새가슴을 가졌고, 자살이라는 선택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문동은을 강해게 만들어준 건 이타심이었다.

자살을 포기하고, 친구를 위한 복수라는 사명을 가슴에 새기자 그녀는 강해졌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것이 살인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악마가 되고 나서,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 선택 때문에

그녀가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은  더 순도 높고, 차갑고,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 화려한 망나니 춤에 매료되고, 감동받고, 설득당하고, 위로받고, 매혹당해서 많은 조력자들이

기꺼이 범죄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화려한 복수극에 가담하면서,  스스로를 옥죄였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함께 치유해 나간다. 함께 망나니 춤을 춘다.

조력자들을 폭풍우가 치는 파도 속에 남겨두고,  홀로 고요히 서있는 복수의 설계자 문동은  이미 지옥의 문턱을 넘어

살아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핏빛복수는 그래서 아름답고, 순도 100프로였고,  주변사람들을 변화시켰고,

결국 자신도 변화되었다.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사람에게서 조금씩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고, 웃음이 스며들었고,

행복이라는 걸 욕심내어보기도 했다.  

트라우마에 갇혀서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자아를 들여다보면, 무늬만 좋은 사람이고 싶은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이타심이 보인다.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그런 이타심은 자기 자신은 위해서는 이기심보다 더 악영향을 끼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내가 좋은 사람이 못된다는 걸 인정하고, 타인들에게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를 챙겨야 한다.


주여정이 가진 죄책감은 의사라는 사명감과 이타심 때문에 증오를  억제할 수 없는  선함마음과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함이 결국은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구원하는 힘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트라우마의 80프로는 이런 선한 마음 때문인지 모른다.

결국 고통이라는 것은 인간이 선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 같은 아름다움일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잠자고 있는 트라우마를 깨워 꼭 안아주고 싶다.

내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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