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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자책하는 따스한 시간.

죄책감

by 토끼

아주 좋았던 과거의 시간의 약간의 기억의 가지고

지금의 힘든 시간을 버틴다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지금 이 정도는 그때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니

지금의 힘든 시간을 버틴다는 사람들도 있다.


좋았던 기억만이 우리의 현재를 버티게 하는 힘은 아니다.

지옥 같았던 기억도 지금의 현재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기억이란 지금 내가 그 기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좋았던 기억 때문에 지금이 더 비참할 수도 있고.

지옥 같았던 기억과 비교하며 지금을 안도할 수도 있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하나를 잘라내고 절망적 상황에 병원에 누워있다면,

두 다리가 멀쩡해서 어디든 혼자 여행을 떠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어제의 기억이 나를 괴롭힐 것이다.


건강했던 과거의 기억이 이 사람의 기억 속에서 추억이 되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삭제해야지만 지금

현재를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친했던 사람에게 손절당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실연당하고

죽음의 저편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을 때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좋았던 그 사람과의 좋았던 순간들만이 아니다.


사랑했던 감정만이 상실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아니다.

상처 주었던 말들 고통스러운 감정도 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어디를 가든 지난 10년간 함께 했던 시간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가끔은 기억 속 한 사람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힘들 때가 있다.

내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한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됐을까?

라는 질문을 했다. 돌아오는 답은 아니다였다.

노력하는 관계는 언젠가는 깨어진다.


그럼 희망 없이 끝난 관계에 후회, 반성,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따스함이다. 관계를 되돌리려는

집착이라는 미련이 아니라, 미래의 나의 인연들에게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너스럽지 못한 옹졸함으로 깨져버린 관계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내 탓이 아니라는 당당함이 단단해지면 나는 괴물처럼 변해 버릴지 모른다.


늘 언제나 곱씹고, 휘어지고, 부러져서,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지고 싶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잊을 수 있는 건 나의 당당함과 죄책감이 함께 공존해야만 가능하다

설령 내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손절당했다고 하더라도

당당함만을 내세우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더 큰 미움을 키울 수가 있다.

그 당당 함안에 나의 실수는 없었는지 내가 잘못한 일은 없었는지를

곱씹으며 나의 잘못을 찾아내야 한다.


나에게 당당함이 피해자에게는 뻔뻔함이 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끝나버린 관계 속에서 나를 곱씹어 후회를 해야지만, 현재의 성숙한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관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은 할 필요가 없어도, 관계를 해석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하다.


관계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진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필요는 있다.

관계 속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짜 자아들을 만들고,

진실한 자아가 병들어 왔는지 모른다.

타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보낸 시간 속에서 나의 자아는 언제나 버림받았다.

그 버림받은 자아들이 관계 속에서 투사가 되어 무의식 속에서 울부짖는다.


누군가의 오만함 앞에서 불안해지고,

누군가의 냉정함에서 외로움에 빠지고,

누군가의 분노 앞에서 상처가 건드려진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말실수를 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관계는 끝나버린다.

구겨져 버린 자존심뒤에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있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냉정함 뒤에는 너무 많이 다친 영혼이 울고 있다.


관계 속 나의 욕망은 거창한 걸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한 아이였을 뿐이다.

관계가 끝나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진실한 나를 발견한다.

나의 온전함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에서 오고

아름다움은 취약성에서 온다.


나는 모자란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나면

침묵하면서도, 나를 끌어안게 되고

멀어지면서 미워하지 않게 되고,

죄책 감 없이 "아니요"하고 말하게 되고,

부끄럽 없이 상대에게 도움을 구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고

스스로의 내면 속에서 진실함을 만나게 된다.


그때 그런 나를 진짜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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