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몽 Mar 12. 2024

베이비스텝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

나의 모든 시작을 함께 해준 17평짜리의 전셋집을 떠나며

  나는 아주 적은 보증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낡고 오래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건설사들이 이 아파트의 무궁한 영화와 발전을 기원한다며 사시사철 플랜카드를 달고 환절기마다 바꿔 끼는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파트 입주민의 대다수가 임차인인, 그래서 아파트 동대표가 없다는 제발 투표해 달라는 간절한 경비원의 방송이 매일 나오는 집주인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미니멀리즘을 적극 실천하는 두 명의 젊은이가 살기엔 알맞은, 하지만 보통의 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두 명의 젊은이에게는 매우 좁은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간에 우리의 짐과 생활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끼워 맞춰가며 아등바등 노력하면서 4년을 살았다.


  곧 아기가 태어날 것을 대비하여 이사를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간 이 집 저 집을 알아보며, 우리의 예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의 조금 넓은 제2 버전의 집들이었다. 차 유리창에 스쳐 지나가는 웅장하고 아늑해 보이는 새 아파트를 보며, 그 안에 따뜻하게 켜져 있는 전등을 보며, 으리으리한 문주에서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젊은 신혼부부를 보며, 저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라고 잠깐 생각해 본다. 우리의 최선과 저분들의 최선이 얼마나 달랐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면 너무 슬퍼지니, 그냥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가 아직 부족한 탓이라는 최선의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자꾸만 내려가는 마음을 다시 잡아채 올린다.


  집을 구할 때 슬퍼지는 사람이 많을까, 기쁜 사람이 많을까. 요즘 나의 유튜브 홈피드에는 빈티지 가구와 화이트 앤 우드로 인테리어가 된, 집안 어디를 찍어도 흠잡을 곳 없는 그런 집들을 소개하는 영상들이 줄곧 뜨고 있다. 집들이를 하는 기분으로 그 영상들을 훑어보면 항상 그 집에 들어오기 전에 감격에 차서 울었다든지, 아니면 그동안 나의 고생이 이 집 하나로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에 허무하다든지 그런 소회들이 나온다. 곧 이사 갈 전셋집에 전입하는 것을 앞두고, 나는 조금 슬프다. 이렇게 계속 때가 되면 출근하고 성실히 일하고, 주변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가끔 회식도 하고 고기도 구우면 나도 누가 봐도 멀끔한 아파트에서 유모차를 끌고 나올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아서 슬프다.


  기쁨에 겨워 울 순 없더라도, 미소라도 지어보려고 한다. 울 수는 없기 때문에. 지난 우리의 4년이 '어떻게 하면 이 짐들을 이 서랍에 다 욱여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시간과 막막함을 조금이라도 아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이사 가는 집에 감사한 점들을 구석구석 찾아본다. 그래도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몇 평을 늘릴 수 있었구나, 그것이 정녕 완벽한 이상형이 아니거니와 너와 나의 소유도 아니지만, 우리의 지난 4년 간의 피와 땀이 그리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다. 다음 이사 때는 유격이 맞지 않는 오래된 갈색 창호 대신 따뜻한 이중의 화이트 창호가 따스함을 보장해 주는 집으로 가게 되겠지. 아기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이면 그래도 녹물 걱정은 없어지지 않을까? 조금 더 지나면 우리의 집을 가질 수도 있겠지. 우리의 삶은, 나아질 거야. 그게 베이비스텝일지언정. 그러니까 멈추지만 말기로 하자.

이전 08화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웅크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