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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몽 Mar 22. 2024

내일과 1년 후가 기대되지 않는다면,

어른에게도 물어주세요,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회사에 다니다 보면 우리의 기분을 잡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인플레이션보다 오르지 않는 연봉, 회사만 아니었으면 상대도 안 할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것, 먹기 싫은 술을 먹어야 하는 회식자리. 그러나 이쯤이야,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고, 10년 후의 멋진 나날을 위해서라는 희망이 있을 때는 그리 이겨내기 어렵지 않다. 나를 가장 낙담하게 했던 것은, 이렇게 열심히 참아내어서 10년 뒤에 '저 사람'이 되어 있겠구나 라는 감정이었다.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시스템이 잡혀있는 회사에 입사해서 퇴사하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사이클을 타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눈에 불을 켜고 하던 신입사원 시절을 거쳐 왠지 이 부서에서 다들 노는 것 같고, 내가 일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은 억울함을 느끼지만 승진을 앞에 두고 있어 참고 다니는 대리시절,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회사에 헌신할 동안 누구는 똑똑하게 재테크에 집중했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일을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서 요령 있게 할까를 고민하는 단계. 현재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상 세전소득에 근 5년 간 임금상승률을 평균내서 엑셀에 입력하면 1초 만에 뽑히는 10년 뒤 나의 가치, 그리고 그 액수에 걸맞고자 행동하는 10년 먼저 내 길을 걸어간 선배. 사람은 기대가 없어지는 순간 녹는다. 내가 흐물흐물 해졌을 때는 이곳에서의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몇 년 뒤면 나도 동기들보다 한 텀이라도 먼저 승진하겠다고 바둥바둥하겠구나, 몇 년 뒤에는 승진을 해서 내 옆 자리의 동료가 하는 일을 내가 하겠구나.' 이미 몇 번이고 본 영화를 리플레이하듯, 정지된 차 안에서 변하지 않는 바깥 풍경을 몇 시간째 바라보듯, 눈을 반쯤 감고, 하품을 하면서 펼쳐질 사건을 관람한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 권태를 타계하는 해결책은 몇 가지가 있다. 1) 전략적으로 로또와 연금복권을 7:3의 비율로 꾸준히 구매해, 뜻밖의 행운으로 로또에 당첨되어, 단번에 사표를 내고 이민을 간다. 2) 이를 지루함보다는 안정감으로 여기며 '회사에 감사한 일 3가지'를 일기에 써가면서 마인드 컨트롤 한다. 3) 내 인생에 '우발적 사건'을 내 손으로 만든다. 


  이 중 당장 즉각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사건 만들기'이다. 지난날 짜릿했던 순간들을 몇 가지 뽑아보라면, 어떤 사건이 있었을 때였다. 이 우발적 사건의 유무에 따라 내 삶의 경로가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의 바로 직전. 대학합격자 발표 여부를 클릭하기 직전, 회사 부사 발령 직전, 이직을 지원한 회사의 합격자 발표 메일을 열기 직전. 미래가 충분히 기대되었다. 원하는 쪽으로 방향키를 힘껏 돌리고자 했다. 그 방향키를 돌린 것은 많은 대안 가운데 내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데서 시작했다. 사건 만들기는 결국, '선택 감당하기'이다. 내 앞날에 대해 많은 선택을 해나가면 많은 사건이 생긴다. 그간 나의 권태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온전한 나의 선택의 결과를 직시하기 힘들어서 대신 지루함을 감당했다. 그래서 내 몇 년 간의 삶에는 위험도 없었지만, 가슴 뛸 만한 사건도 없었다. 하루의 시간을 점심식사를 기준으로 삼아 오전도 끙- 오후도 끙- 하면서 일주일에 다섯 번을 잘 견뎌냈을 뿐이다.


  내 하루에 내 선택을 늘려가자. 작게 시작하자. 평소에 가던 카페와 다른 카페를 가보자. 다른 메뉴를 골라보자. 취미를 '선택'하자. 크로스핏과 클라이밍 중 선택해 보자.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선택을 만들어가다 보면, 나중엔 내 손으로 장래희망정도 선택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일하던 직무와 부서가 마음에 안 든다면 부서이동을 '선택'하자. 아무리 선택해도 이 회사에서의 내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면, 다른 회사를 '선택'하자. 회사가 싫다면, 평소에 꿈꾸던 분야의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선택'하자. 그리고 응모버튼을 누르자. 아주 간단하다. 그저 준비물은, 여든 살에도 내 인생의 방향을 궁금해하는, 장래희망을 가진 할머니가 되겠다는 마음. 그리고, 내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든 나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마음만 준비하면 그만이다. 어렵지 않다. 100%의 지루함을 선택할 것이냐, 확률적인 리스크를 선택하고 두 눈 반짝이며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냐. 이 또한 오롯이 나의 '선택'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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