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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몽 Mar 11. 2024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웅크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시간

  회사에 다닐 때는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하루만 보면 시간이 그렇게 안 갈 수가 없는데 한 주를 돌아놓고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난 지 모를 정도로, 어제 무엇을 먹은 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출근해서 옆 자리 박 대리님과 뒷자리 이 차장님과 교류하고 요즘 뭐가 난리더라 하는 이슈도 주고받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즘엔 이런 거 투자 안 하면 안 된다더라 하는 여러 대화들 사이에서 하루종일 헤엄치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저녁 해결하고 빨리 자야지라는 목표 하나만 가지고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소식을 듣고 저 사람의 생각에 우왕좌왕하다가, 회사에 나가지 않으니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짖는 거라고는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와, 카페 가서 커피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나와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 등등. 나에게 누구도 와서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는다. 이 서울 한 복판에서 혼자 고립된 느낌이 처음에는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평생 기관에 속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허할 수가 없다는데, 정년퇴직을 한 60대의 심정이 이런 마음일까. 어쨌든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웅크리고 있다.


  내 손에 거의 최초로 주어진 무한대의 시간. 참 미숙한 인간인 것이,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마냥 좋을 것 같았는데, 하루종일 책도 보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다 배워보고, 보고 싶은 넷플릭스 미드 다 보고 졸리면 자야지라고 누구보다 야무진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이런 시간이 손에 쥐어지니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당황스럽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더 괜찮은 일을 하고 있을 것 같고, 더 많은 뉴스를 들을 것 같고, 그래서 더 좋은 선택을 해 나갈 것 같다는 불안감. 고립된 이 공간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것이 딱히 잘못은 아닌 것이, 태초로 인간이 태어나 걸을 때부터 홀로 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식이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만 모르는 것 같다면 불안감이 자극되게 프로그래밍되어있다고 한다.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움직이면서 살아남은 인간이 내 조상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이런 마음은 결코 하(下)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대(大) 인간 유전자 프로그래밍에 따라 잘 발달된 정상적인 인간이라서 갖게 되는 것이다.


  가만하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회사를 다닐 때 내 생각, 내 자원은 생각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회사의 자원을 잘 활용해서 회사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일 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나면 KPI안을 뜯어보듯 공부하고, 회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가용할 수 있는 회사의 자원을 떠올린 후, 달성할 수 있는 회사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일만 해오다가 막상 나의 자원과 나의 목표를 생각하려고 하니 이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라, 2024년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목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퇴직이나 이직이란 글자에 가로막히는 목표가 아니라 온전히 내 숨이 다 하는 그날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영구적인 목표라는 것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진짜’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캡틴 판타스틱> 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끄고 한 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 영화는 학위, 제도, 자본주의 등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한 가족이 산속에서 사슴을 사냥하면서 생존하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틀 안의 삶이 정답인지 틀 밖의 삶이 정답인지 그 사이에서 방황하던 주인공의 아들은 결국 틀 안도, 틀 밖도 아닌 제3의 자선택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진짜 중요해?’라는 질문을 나한테 던져줬던 영화였다. 갑자기 지금 시점에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나는 이 시간을 세상에게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쓰고 싶다는 결심을 말하고자 함이다. KPI 안의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에서 벗어나, 나에게 ‘진짜’가 될 선택지는 회사 밖의 시간, 웅크림의 시간이 빚어줄 것이다.


  캡틴 판타스틱에는 다음 대사가 있다.

“늘 진실만을 말하고, 비굴해지지 마. 매일매일을 네 생애 마지막 날처럼 살고, 용기 있고 패기 있게 만끽해, 인생은 짧다. 죽지 말고, 가라! “


  삶의 트래픽을 잡아먹는 '가짜'를 발견하고, 제거하고, 죽지도 않고, 눈을 딱 감고 '진짜' 인생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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