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이 다양한 색깔로 빛나기 위해 필요한 것

너에게 건네는 질문 9.

by 오수


기자 동기들과 송년모임이 있었어. 족발에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지. 두 명은 입사 동기였고 한 명은 한 기수 낮은 후배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특히 기자 일을 하면서 참 많은 관계들이 형성되는데, 점점 그 관계들이 비즈니스를 위한 관계가 되고 있는 것 같아.

너 나 필요해? 나도 너 필요해. 그럼 우리 친하게 지내볼까? 뭐 이런.

이런 관계들이 일을 할 땐 참 절실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참 공허해진다.

너와 함께 동네를 지나가다가 네가 동네 인싸 마냥 지나가는 아이들한테 줄줄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관계들 속에 있는 네가 부러워지기도 해.


그런데 지금 와서 새로운 인간적 관계를 쌓아가자니 차곡차곡 그 관계를 쌓아갈 시간도 없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에너지를 쓸 기력도 점점 없어진다. 그래서 옛날에 맺어진 비즈니스를 떠난 인간적 관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함께 지낸 그 세월들을 서로 공유한, 입사동기 같은 그런 관계 말이야.





그중 한 동기가 말하더라. 내년 2월부터 육아휴직에 들어간다고. 아이가 막 돌이 된 동기였지. 와이프가 육아휴직이 끝나가 자기가 육아휴직을 해서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어. 육아휴직을 두 번이나 풀로 꽉꽉 채워낸 휴직 선배로서 말이야, 내 안에 뭔가 해줄 말이 없을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


솔직히 말하면 말이야 너를 뱃속에 10개월 동안 품고 네가 내 몸속에서 툭 튀어나왔을 때, 너에 대한 애정이 앞뒤 없이 마구 솟아오른 것은 아니었어. 오히려 좀 낯설었지. 핏덩이로 튀어나온 쭈글쭈글한 네 모습이 낯설었고, 내가 그런 너의 엄마라는 것은 더 낯설었다. 낯선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태어난 이후 내게 주어진 삶.

엄마로서의 역할과 회사에 고용된 직원의 역할이란 애매모호한 경계 속에 한참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살아보지 않았던 주어진 삶은 낯섦을 넘어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거야.

너를 낳기 전엔 온통 나 자신을 위한 삶이었다면 네가 세상에 나온 이후론 그 삶은 붕괴되고 너를 위함과 나를 위함의 그 언저리 속에서 꽤나 오래 방황을 했다.





일을 하다가도 어린이집 선생님의 상담 전화를 받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널 안고 한참을 망설이다 회사에 출근을 못한다는 전화를 걸어야 했고,

너를 돌보면서도 밤 열 시까지 당직을 서야 했지.

이도 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이어졌고,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얼추 모든 일이 돌아간다는 것도 덤으로 깨달았지.


그 동기는 육아휴직 기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 그런 동기에게 난 이런 말을 해줬어.

모성애 부성애라는 것이 하루 한순간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너와 인간적인 관계를 오랜 시간을 거쳐 쌓아나갔듯 아이와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고. 육아휴직 시간은 아이와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는게 좋을 것 같다고.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삶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혼란스런 상황이 이어질텐데,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끌고 갈지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아이를 잠시라도 어린이집에 맡겨 두고 혼자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어.


cdda58cd-0454-4772-921f-7ea9f3ab2e1c.png 챗GPT 활용 이미지 BY 느린 걸음



육아휴직과 함께 내 일을 멈추고 너와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너를 원에 보내고 오롯이 나 혼자 있었던 시간. 그 순간들은 내 인생에 아주 값진 기억으로 남았다.

새로운 내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순간이었지. 비록 아직까지도 이도 저도 아니게 정돈되지 못한 내 삶에 대한 결론을 내리진 못하고 있고, 그에 대한 결론이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야.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들이 있잖아. 삶이 막막하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때 필요한 건 지친 내 자신을 돌아보고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면 예상치 못 한 행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 예를 들어 내가 너에게서 느끼는 모성애 비스무리한 그런 감정들 말이야.


네가 살면서 그런 순간이 다가온다면, 그 순간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회피하기 보단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여유가 필요하단 생각이야. 네 인생의 아주 중요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가 네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시간 말이야.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순간이 어쩌면 네 삶이 다양한 색깔로 빛나기 직전인 순간일 수 있을테니 말이야.


ChatGPT Image 2025년 12월 17일 오전 11_01_23.png 챗GPT 활용 이미지 BY 느린 걸음


화, 목 연재
이전 09화로또 5억 원에 당첨된 사나이와 당첨금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