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회식자리가 스트레스란 분들
어제 시내 모처에서 밥 한끼를 떼웠다.
떼웠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게
이미 사전 예약한 한 회사의 거~한 송년회가 진행중인 음식점에 겨우 남은 좌석에서
허기를 달래었으니 그렇다.
벽면에 붙힌 현수막
'00기업 송년회'
8시도 안 된 저녁시간인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분들의 얼굴이 모두들 빨갛다.
요즘은 소주 도수도 낮아 쉽게 취하지도않는다는 주당들의 말이 있는데
고기는 소주를
소주는 고기를 부르는가보다.
그들의 선점은 이해한다.
송년회의 의미도 이해한다만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콧구멍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다싶었다.
매 잔을 들을 때마다
"000,000"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박수도 친다.
이어지는 건배사에 무조건 박수다.
떠들석한 분위기, 한 해 묵은 감정을 다 털어버리라
남자분들끼리 러브샷도 보인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른다.
" 저는 노래로 대신하겠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가사지만 내용인즉슨
"위하여 위하여"가 여러번 나오는 걸 보니
건배사인가보다.
어떤 기사를 보니 건배사때문에 회식이 불편하다고 한다.
모두들 다른 건배사를 준비해야한단다.
식상한 것은 아웃
신선한 것은 오케이
그 것때문에 '센스있는 건배사' 를 포털에 검색하면 주루룩주루룩 많이도 나오더라.
변사또-변함없이 사랑하고 또 만나자
박보검-박수를 보냅니다. 겁나게 열심이었던 당신을 위해
흥청망청-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
오바마-오늘은 바래다줄께 마시자
통통통-의사소통, 만사형통, 운수대통
청바지, 당나귀, 지화자...고전같은 개나발까지
수두룩이다. 이렇게 많으니 더 고민이 된다.
뭔가 화끈한 거 없을까? 회식분위기를 완전 고조시킬 그런 명대사? 회사이름이 들어가면 더 좋겠고...
아니, 매번 잔을 들면서 꼭 건배사를 해야하나? 그냥 좀 마시면 안되나?
라떼는 말이야겠지만 내가 회사다닐 때 회식의 건배사는 비교적 높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다.
" 00부장님, 00차장님, 한 말씀하시겠습니다."
어느 사무실이나 말잘하고 사회잘보는 한 사람이 주축이 되어
이 사람 저 사람 일으켜세워 한 말씀 듣고 건배사 듣고
" 위하여!!!!" 란 합창이 이어진다.
술이 술술술 들어가는 와중에도 사회자는 정신을 차리고 있다.
노래로 흥을 돋구는데만 전념한다. 누구를 시켜야 분위기를 살릴려나
왕고들의 건배사와 노래가 끝나면 전직원의 라이브 생목소리 노래가 이어진다.
" 다음엔 너 순서야" 라고 사회자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평소 나서기좋아하는 끼많은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레파토리가 있지만
그렇지못한 내성적인 이들에게 회식이란 거의 공포에 가깝다.
슬그머니 가방을 밖으로 던져놓고 화장실 가는 척하다 줄행랑~
이러니 여직원들은 회식의 의미를 몰라
이러니 여자들이 사회생활 잘 못한다고하지
이러니 저러니 잔소리와 타박을 들으면서도 다음 회식,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시간대에
또 줄행랑이다.
노래대신 벌주가 연신 주어지는 것도 회식을 두렵게한다.
기억하건대 알콜분해가 전혀 안된다는 직원이 두 명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 괴로운 상황을 극복시킨다는 누군가의 강제에 한 잔 마시고
양말이 벗겨졌는가하면
또 한 사람은 다음 날 출근은 커녕 안경이며 가방까지 다 잃어버려 곤혹을 치렀다고했다.
" 엄마, 저런 거 보면 회사 다닐 때 생각나지않아? 회사생각 안나?"
함께 끼니를 떼운 딸에겐 모르는 사람들의 으샤으샤가 소음이면서도
뭔가 재밌을 것 같은 상황인가보다.
" 기억나지. 왜 안나?"
노래시킬까봐 덜덜덜
부장님, 차장님옆에 앉히려는 00대리님때문에 덜덜덜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장님 차장님옆에 앉히기에는 내가 다소 밀리는 외모라 그런지 대기표도 없었다.
심지어 2차노래방에서도 내 이름을 부르며
"000야~너는 노래해" 라면서 다른 여직원들과는 부르스를 연신 추었던 부장님!!!
다음 날 전 여직원이 부장님의 슬그머니 나쁜 손을 뒷담화를 했을 때
나는 노래한 기억밖에 없다는 현실이 웃프기도 했다,
의문의 1패란 말이 그런거였을까
그나마도 이제는 왕년에, 한 때, 예~전에란 수식어를 버릴 수 없다.
건배사때문에 스트레스받아요란 기사제목이
나처럼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들에게는 부러운 상황이기도 하다.
회식을 할 수 있다는 그 '소속감 '
오랫동안 한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남편도
한 날
" 아휴 지켜워. 회식, 매일 똑같은 장소, 똑같은 메뉴, 똑같은 사람들"
그 말에 나는 진정 화를 냈다.
" 당신말야, 그 회식하는게 얼마나 부러운지 알아????? 나도 그 목걸이 매고 회식하고싶단말이야!!!!"
생각해보니 회사 다닐 때 업무의 완성도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조금 더 신경쓸 걸 그랬다란 아쉬움이 더 크다.
일은 잘해봐야 도진개진,
자기 월급받은만큼은 연수가 차며 그만큼 해내게 되어있지만
인간관계는 그렇지않았던 것 같다.
회식자리에서 평소 말을 나누지못했던 이에게 술잔도 권해보고
꽁했던 사람에게도 술잔을 건네보고
술자리니 가능한 진실토크도 좀 해볼걸...이란 아쉬움이 있다.
물론 그 분들과의 일잔일언이 대단한 영향을 주는 건 아니겠지만
앉아서 먹기바빠, 남이 하는 노래며 건배사에 웃음도 박수 치느라 바빠
적당한 시간대 도망가기 바빠
나의 건배사는 걸걸걸이다.
할 걸, 말할 걸. 권낼 걸, 마실걸, 도망가지 말 걸...더 잘할 걸...
에.이... 진짜 그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