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심소현 Oct 03. 2021

내 아이를 위한 가장 값진 노력

부모인 나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 세계인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던 코로나 19가 발발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다. 당시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신종 바이러스가 이렇게까지 모든 이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일상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도, 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도,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 간 만남을 자제해야 하는 것도, 불과 2년 전에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답답한 마스크 좀 벗고, 친구와 가족들도 자유롭게 만나고, 해외여행도 가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속으로 품어 보지만 그 시기가 언제 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터널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 백신이 개발되었다. 치료제 개발에 대한 뉴스도 간간이 들려온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니 코로나 바이러스를 예전 독감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지기를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코로나 종식에 대해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고 있지만 팬데믹 종식에 대해 아예 희망조차 갖지 못한다면 어떨까? 전염병에 걸렸는데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어떤 병인지 전염병에 대한 정보도 없고, 심지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간다면? 길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삶에 대한 한 가닥 희망 조차 갖지 못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바로 14세기,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의 상황이다.


중세 유럽의 중심은 ‘신’이었다. 의학이나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 시대였기에 전염병에 대해 지식이도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중심이었던 중세 유럽에 퍼졌던 페스트라는 신종 전염병은 ‘신의 형벌’이라고 간주되었다. 현대 의학이 발전된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모두 불안해했다. 그나마 지금은 최신 의학 자료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각종 매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이름 모를 전염병에 감염되어 피를 토하고 피부가 괴사 하며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성직자들 또한 회개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가르쳤다. 결국 페스트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기 위해 종교 시설로 몰려갔고 안타깝게도 이로 인해 페스트는 더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중세시대 의사들은 페스트 환자들에게 피를 뽑아내는 이른바 ‘사혈’이라는 치료 방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나쁜 피를 빼고 나면 깨끗한 피만 남아 몸이 정화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페스트에 걸려 면역력이 낮아진 환자들의 병세를 더 악화시켰고 비극적 이게도 환자들을 더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전통적인 매뉴얼대로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성직자들은 기도만이 살 길이라며 환자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고, 의사들은 사혈이 최선의 방법이라며 환자들의 피를 뽑았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환자들에게 그대로 전염되어 함께 죽었고, 사혈을 한 환자들은 더 빠르게 죽었다. 의학과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시대적 한계, 어찌 보면 페스트라는 병에 대해 알지 못했던, 의학적 지식의 ‘무지’가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모른다는 것, 무지(無知). 우리 인간이 잘못하는 행동은 대부분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했다. ‘저들이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악한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보기에 몇 세기 전 사람들의 행동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보다는 이제 우리가 발전한 과학기술 덕분에 조금은 더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나중에 이 시기를 돌이켜본다면 어떨까. 앞서 페스트와 코로나19의 예를 들었지만 비단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부분에서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 전반을 돌아본다면 말이다.


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실제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무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가 특히 육아와 교육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인 우리는 우리가 아이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교육을 할 때도 늘 이것이 전제가 된다. 아이들보다 최소 몇십 년은 더 많이 살아봤으니 세상에 대한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이 있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물론 생활 습관이나 규칙, 사회적 규범 약속, 도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부모의 경험과 연륜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까지 너무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공부는 이 정도는 해야 기본이다’라는 말로 아이들에게 무리한 학습 시간과 과제를 요구하기도 하고, ‘엄마가 다 알아봤는데 이 학원이 제일 좋다’며 정작 아이는 원하지도 않는 학원을 보내기도 한다. ‘지금 이렇게 선행 안 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라는 말로 아이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정보들이, 그리고 아이들에게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이 20년 뒤, 30년 뒤 미래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벌써 10여 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나는 삼성증권 투자정보팀에 근무하며 사내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의 일과는 아침 7시 반 전국 삼성증권 지점에 방송되는 사내 방송을 시작으로 8시 부서 회의에 참석하고 주식 시장이 개장된 9시 이후에는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장 중 시황을 MBC 뉴스를 통해 생방송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증권 뉴스도 늘 긴장되었지만, 개장 전 뉴욕 증시 상황을 분석하고 국내 증시를 전망하는 투자정보 회의 또한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내 머릿속 어딘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그날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전망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진행되던 날이었다. 당시는 스마트폰 시장의 초창기로 애플과 모토롤라가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고 삼성은 후발주자로 옴니아폰을 막 내놓던 시기였다. 임직원들 대부분은 2G 폰을 쓰다가 옴니아폰을 사서 쓰기도 했는데 오류가 자주 나고 인터넷도 너무 느려서 과연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의 후발 주자로 나서 성공할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또 하나의 이슈는 과연 당시 백만 원 가까운 금액의 스마트폰을 회사원이나 전문직종이 아닌, 일반인들도 구매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의견은 거의 반반이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고가의 스마트폰을 전업 주부나 학생, 퇴직자들 과연 사서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애널리스트 절반 이상이 회의적인 의견을 보였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주부나 학생들이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과연 스마트폰을 구매할까’에 대해서는 당시 그 누구도 자신 있게 '그럴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당시의 회의 내용이 무색할 만큼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초등학생 손주가 SNS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다. 국내 최고의 애널리스트들이 갑론을박 토론을 벌이며 미래를 예측했지만 당시에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미래는 펼쳐졌고 이제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 됐다.  인공지능과의 공존도 생각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그 분야의 전문가라도 ‘안다’라고 말하며 자신 있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활동하게 될 10년 후, 혹은 20년 후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이 우리가 지나 온 과거 10년보다도 더 빠르게 변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모인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가 그나마 너보다 좀 더 안다는 명목으로 ‘국영수는 기본이고 일단은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을 갖게 된다’고 아이를 억지로 책상에 앉혀야 할까. 노후가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인 공무원이 여전히 최고라고 구시대적인 믿음을 아이에게 심어주어야 할까. 적어도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게 자명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부모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은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내면의 힘을 갖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높은 자존감과도 연결된다. 즉 내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계획해서 열심히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2033년까지 현재 직업의 47% 이상이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일본의 경영 컨설턴트 스트키 타카히로는 자신의 책 <직업 소멸>에서 ‘30년 후에는 대부분의 인간이 일자리를 잃고 소일거리나 하며 살 것’이라고 전망했다. 몇 년 후를 예측한다는 게 쉽지 않은 시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하는 직업군들이 어느 순간 인공지능에 대체될 수도 있다. 현실이 이런데 현재 부모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자라고 공부해 온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착각하며 아이들을 자신들이 예전 방식대로, 아니 어쩌면 더 혹독하게, 좋은 대학만을 보내기 위한 공부와 점수에 목을 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부모들의 인식이 세상 변화를 인지하고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아이들 앞에서만 아닌 척했던 그 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엄마 아빠도 ‘모른다’는 걸 무지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부모인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고, 틀릴 수도 있고,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배울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모든 인간은 내가 인식하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믿고 살지만 조금 더 관점을 넓혀서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 아이들을 위한 가장 값진 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겸손한 믿음이 나와 내 아이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지 모른다.

이전 17화 교육을 받을수록 무기력한 인간이 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