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의 무능

살림왕도 SKY맘도 아닌 그냥 전업주부

by 김봉란
Wonderwoman 1970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50대로 보이는 뽀글 머리 아주머니가 발부터 디밀며 집안에 침입하셨다. 신원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신발부터 벗고 들어와서는 주방을 향해 돌진했다. 정신을 쏙 빼놓는 빠르고 호들갑스러운 말투였다. 관리실에서 나왔다며, 지금 빌라 전체의 주방 후드를 점검하고 청소, 교체 작업을 한단다.


후드를 힐끗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좀 찌부러지는 것 같았다. '어후 불결하다, 청소로는 어림도 없고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데'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아니, 아주머니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딱 한 번 때 빼고 광낸 후 한 번도 들여다보질 않아, 혼자 찔려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낯선 침입자 앞에서 난 좀 위축이 되었다. 우리 집이 너저분한 게 막 창피하고, 후드 청소를 안 하고 살았던 것이 무슨 중죄여서 저승사자가 나를 끌고 가기 직전에 아주머니께 반드시, 지금 당장, 롸잇나우 후드 청소 의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응애~~!"


아기의 울음소리에 혼미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쏟아붓고 계시던 아주머니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을 껌뻑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뗄 여력이 생겼다.


"아주머니 관리실에서 오신 거 맞나요? 저는 전달받은 게 없어서요. 금시초문이에요. 지금 확인 한 번 해볼게요."

핸드폰을 찾으려는 나의 손짓에, 아주머니는 이전보다 더욱 어수선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애기 엄마, 이사 가나보다. 이삿짐 싸나 보네."

"아니요, 이사 안 가는데요."

"아, 맞벌이구나."

"네?"


이 훤한 대낮에 내가 버젓이 여기 서 있고, 아기가 울어서 안아 올리고 있는 이 상황을 눈앞에 두고?!!


황급히 떠난 아주머니는 알고 보니 관리실에서 보낸 적 없는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다시 볼 일 없는 그녀가 우리 집 꼴을 보고 남긴 말들은 헛웃음과 함께 오랜 여운을 남겼다.


Eva Armisen [내 마음이 말할 때]


아침이면 새로운 하루의 가능성에 눈이 부시다. 어제는 못 했지만, 오늘은, 작성한 수많은 투두 리스트의 줄을 그을 수 있을 거야!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얼룩이 진 아이의 망사 공주 옷 손빨래를 미루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이 흘린 무엇인가가 딱딱하게 들러붙은 주방 바닥 손걸레질도 할 것이다. 아! 참 선풍기 씻어서 넣어 놔야 하는데... 저녁도 대충 때우지 말고 미리미리 준비해서 야채 듬뿍 카레를 만들 거야. 아이의 숙제는 밤에 자기 전에 간신히 챙기는 것이 아니라, 집에 오면 바로바로 봐주고, 책도 몇 권 읽어주리라. 그리고, 나의 글을 꼭 써야지. 잠깐이라도 꼭 운동해야지. 로션이라도 바르고 자자. 세수라도. 등


이것은 일상적인 결심들이다. 날마다 다짐하는데 날마다 실패한다. 해치우는 것은 서너 가지뿐이다. 잡일이란 본디 줄어드는 법이 없는 것 같다. 두 가지를 처리하면 네 가지가 따라온다. 회사 다닐 때가 생각난다. 그 시절에도 잡무들은 내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일들은 지속적으로 미뤘다. 그때는 돈이라도 받았었다. 따박 따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원하는 것들을 샀다. 명함을 방패 삼은 번듯한 일상의 혜택을 누렸다. 공연 기획사를 다녔는데 하사 받은 초대권으로 가슴 설레는 뮤지컬을 챙겨 봤다.



하찮은데 급한 종류의 잡무들을 다 처리하지 못했어도, 내가 무익하지는 않은지 회사에서는 자르지 않았다. 허상일지언정, 강남 한복판에 있는 큰 빌딩에 출퇴근하는 커리어우먼이라는 정체성이 버틸 힘을 줬다. 이렇게 잡일만 처리하며 사는 인생이 무슨 의미냐며 사표를 꺼냈을 때에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붙잡아주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잡일 처리반장도 꼭 필요한, 중요한 존재였나 보다.



그러나, 집에서는 어디에 눈을 두건, 어느 때이건, 사방이 나의 무능을 드러낸다. 설거지가 쌓인 싱크대가, 정리되지 않은 거실 바닥이, 부족한 요리 실력의 밥상이, 훈육 중에 도끼눈을 뜨는 아이의 눈빛이, 삶이 내 통제권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아우성이다. 순간순간 나의 무능을 직면한다. 잘하지 못하는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때, 육아에 몰입하던 시기에는 가사 효능감은 없어도 육아 효능감이 높았다. 집이 좀 어질러져 있고 너저분해도, 나는 우리 아이와의 즐거운 시간이 더 중요하다며 개의치 않았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지극정성한 아이 속에 자기 중심성이 보였다. 배려해 준 만큼 남을 더 배려하는 아이가 되는 건 공식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를 소황제로 키웠음을 깨달았다.


Van Gogh [Fifteen Sunflowers in a vace]


코로나 덕에 끝없이 이어진 24시간 가정 보육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무렵, 동네 정신 건강 증진 센터를 찾아갔다. 생전 처음 보는 상담 선생님께 내가 엄마 노릇을, 아내 노릇을 너무 못하고 있노라고, 그런데 더는 못하겠다고 울며불며 허물을 나열했다.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인생이 억울하고 화가 났던 응어리진 마음의 기저에는 내가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고 있다는 자책이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작은 일에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분노가 일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꾸 소리를 질렀다. 김버럭이 되고 있었다. 이런 역할들을 다 때려치우고 욕망을 유예하거나 가족을 위해 양보하는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이야기했다. 코를 풀다 상담실의 휴지를 다 써버릴 뻔했다.


나보다도 젊은 상담 선생님은 차분히 듣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김봉란님은 지금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으신 거네요.

김봉란님은 가정을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런 마음조차 없을 수도 있는 건데,

김봉란님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신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거 아닌가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지만,

정말 쉽지 않은 그 일, 잘하고 계시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게 웬 말인가.

나같이 무능한 사람이, 잘하고 있는 거라니.



남편도 내가 하소연할 때,


“그래 당신 정말 애쓰는 거 알지. 우리 마누라 정말 고생 많아.”


인정도 해주고, 토닥여 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정작 위로가 되지는 않았었다. 왜냐하면 고생을 덜어주는 것보다는 말로 때우는 느낌이 들어 화가 나곤 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가짐 자체가 훌륭하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말은 지금, 여기에, 숨 쉬는 존재로 지지를 얻는 발언이었다.


날마다 무능을 직면하고 있는 내게

'아니야, 너는 무능하지 않아. 너는 지금 그 자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거야. 쉽지 않은 그 일을 어떻게든 버티면서 헤쳐나가고 있는 너는 정말 훌륭해. 게다가 글을 쓰고 싶은 꿈까지 포기하지 않았잖아. 사명을 생각하는 마음, 참 귀하고 소중한 마음이야.'



집에 돌아와서도 상담 선생님의 말씀은 메아리를 쳤다. 내면에서 구체적인 나의 언어로 바꾸어서 셀프케어 서비스에 들어갔다.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일이 아무리 중한 것이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수입이 없는 것은 곧 무능한 것이 된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도 그 액수에 따라 자신의 하는 일이, 즉 자신이, 마치 가격 매겨진 상품처럼 명품이나 싸구려의 가치를 지닌다고 착각하기 쉽다. , 일을 하지 않고 돌봄을 전담하는 전업주부라면, 대신 살림9단, 혹은 열성 엄마표로 공부 잘 시키는 엄마가 돼야한다고 느낀다.



정아은 작가가 쓴 책 제목처럼,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 그것은 사기꾼들의 말일 뿐이다.

애쓰는 나, 견디는 당신, 무능하지 않다. 엄마 한 사람의 부재가 일으킬 수 있는 카오스를 막고 있는 원더우먼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이 직책, 엄마. 우리 모두 좀 더 어깨에 힘을 줘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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