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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Nov 17. 2023

전생의 공병장수는 사은품 거절하는 여자가 되었다

짐정리 일지 D-47,46,45


전생에 나는 공병장수였나?

D-47


기회다!

학교에서 벼룩시장을 한단다. 가끔 있는 이런 황금 찬스는 놓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물건을 내보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물건이 거의 없길래, 엄마가 나서서 서랍 칸마다 손을 넣어 휘적거렸다. 퇴출시켜도 될 듯한 잡동사니들이 그득하다. 마음만 굳세게 먹는다면 전부 비울 수도 있을 것 같은...



하지만 비움도 운동이나 글쓰기와 같아서 근육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50킬로 역기를 들 수 없는 것처럼 비움도 얼마간의 워밍업과 마음 준비가 필요하다. 무엇을 비울지,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저것도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고, 언젠가 꼭 쓸 것만 같다. 정든 물건인 경우에는 더더욱 연을 끊기 힘들다. 강제적인 규칙 -> 반드시 하루에 한 개, 혹은 하루 다섯 개를 비워야 한다고 정해 놓고 두 달쯤 했더니 조금 쉬워졌다. 비움의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우유부단한 내 캐릭터에 결단력 15 포인트 상승했다.



처음 비움에 임할 때 가장 손쉬운 것은 집안에 은근슬쩍 똬리를 틀고 있는 쓰레기를 방출하는 것이다.  화장대 주변을 치우면서 내가 전생에 공병 장수였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 공병 이벤트에 응모해 볼 요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열렸던 이벤트는 다시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내겐 게으름과 귀찮음이 더해져 저렇게 한 무더기가 될 때까지 차곡차곡 모인 것이다.



상부와 하부를 분리하고 아래의 플라스틱 연결부를 해체해야 한다



라벨을 자세히 보니 아랫부분은 재활용이 되지만 스포이드나 스프레이 부분은 재활용이 어렵단다.

종량제 봉투에 분리해서 넣었다.



화장실 청소용품, 다용도실 세탁세제, 화장실 세정제들도 공병을 제 때 제 때 버리지 않으면 주변이 어수선해지는 요주의 인물들이다. 주의가 필요하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자기 물건은 단 한 개도 팔리지 않았단다. 인기가 없었나 보다. 아이돌 카드 같은 걸 가져온 아이들이 큰돈을 벌었다는데, 이 엄마가 애들 수준에 맞지 않는 유치한 물건들만 들려보냈나보다. 미안해졌다. 사실 저기 고른 것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 받은 물건들이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요긴해지는 아름다운 거래를 하려면 그에 맞는 상대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불필요한 물건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아들이 방문 영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선생님이 사은품이라며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머그컵을 들고 오셨다. 나는 머그컵을 굉장히 애정하는 사람으로, 디자인과 그립감과 입술에 닿는 곡선까지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머그컵을 쓸 아량이 없어, 선생님께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혔다. 집에 너무 많아서 안 주셔도 괜찮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래도 받으라며 몇 번 더 권하시는 걸 끝까지 사양했다. 사은품을 거절하는 사람은 처음 보신다고 했다. 약간 특이한 엄마가 되었지만 그런 단호함이 있어야 물건 처리에 힘을 따로 쏟지 않을 수 있다.



D-46


여섯 살 딸이 보더니,

여기가 우리 집 맞냐고 물었다.

남편은 박장대소했다.

확연하게 깨끗해지는 안방을 보며

실실 사랑한다고도 했다.

(당신들, 화장대에 물건 올리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둔다.)


실은 몇 달 전부터 치워야지 생각했었다.

투두 리스트에 반복적으로 등장했지만 끝내 지우지 못했던 항목 : 화장대 치우기. 마음먹은 것을 진짜 해내는 것이 내겐 어렵다. 미루기 대장이라서, 애가 고양이 놀이하자고 해서, 마법 걸린 날이라 손가락 들 힘 없을 정도로 피곤해서, 아버님 병원 진료 따라가보느라, 등등 날마다 이유가 없지 않았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 오늘, 실행력 30 포인트 쌓였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이삿짐 정리의 레벨을 높여가고 있다.



프레임 바깥, 화장대 밑은 아직 요지경.



D-45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말이 딱이다.

매일 자기 전 사이렌을 울려야겠다. 십 분 정리정돈 후 소등하는 가족 루틴을 건의해 볼 테다.





본격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이삿짐은 아직 건드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눈에 잘 띄는 공간들이 깔끔해지니 뿌듯하다. 힘 빠지는 집안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그 공간에 있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잊고 살 때가 많은데,

.

.

.

맞아,

.

.

나 귀한 사람이지.




그 명백한 게

쓰레기 더미에 둘러쌓여 있으면

잘 생각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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