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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Jan 02. 2024

90세 권사님이 금가락지를 주셨다

D-1,0 + 에필로그


십 대 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꽤 충격적이라 생각했다. 사랑과 불륜이 모호해지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요, 중년 남녀의 러브신 때문도 아니요, 엄마의 일기장을 자식들이 읽는다는 설정 때문에 뜨악했다.



나는 어렸을 적에 꽤 많은 일기들을 썼는데, 학교 제출용이 있었고, 작은 자물쇠로 잠긴 진짜 진심 일기장이 따로 존재했다. 엄마가 훔쳐볼까 봐 노심초사했고, 고민 끝에 나만의 글자를 개발해서 썼다. 예를 들어 ㄱ은 세모 ㄴ은 거꾸로 세모 같은 방식으로 암호를 설정한 것이다.



모닝페이지를 알게 되고선 많은 지면에 여과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모닝 페이지라는 것은 일어나자마자 약간 정신이 혼미할 때,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날것 그대로의 원초적 내면을 써 내려가는 행위이다. 함께 새벽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쓰던 지인들과 했던 말이, 죽기 전에 저것은 반드시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데스 클리닝, 몇 년 전에 처음 들어봤던 단어였다. 데스 클리닝은 죽음(death)과 청소(cleaning)가 합해진 용어다. 죽은 뒤 가족들이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지 않도록 죽음에 대비해 미리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거나 기부하며 남은 삶의 방향을 찾는다. 또 고독사나 범죄 피해 등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비하여 미리 사생활을 정리한다는 측면도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아직 애들 키우고 정신없이 사는 와중이라 내게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 일이었는데, 최근 지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들을 목도하면서 이 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정돈되지 않은 큰 짐을 남기고 가시는 어른들이 심심찮게 있더라. 자식들이 고인이 되신 부모님의 물건으로 잔뜩 둘러싸인 집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결국 업체에 맡겨 대량 폐기하는 일들을 보았다.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지난 연말의 어느 날, 교회의 연로하신 권사님께 연락이 왔다. 아이들에게 짜장면을 사주고 싶으시다고. 평소에도 늘 아이들의 과잣값을 봉투에 담아 챙겨주시던 어른이었다. 우리 가족은 외식할 생각에 신나서 들뜬 마음으로 동네 중국집에 도착했다. 권사님은 한 손에는 지팡이를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오셨다. 짜장, 짬뽕, 탕수육까지 야무지게 시키고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권사님은 쇼핑백에서 무얼 꺼내셨다. 좀 반짝이는 것이었다. 마른 손을 내밀며 이걸 가지라고 하셨다. 금가락지였다.



짜장면은 철없이 감사하게 얻어먹어도 세월을 품은 금반지는 죄송해서 받을 수가 없었다. 요즘 금값이 또 얼마나 엄청난가. 괜찮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권사님은 이런 거 정도는 끼고 다녀야 강도를 만나더라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다고 하시며 그와 함께 덧버선이며, 머플러, 누빔 조끼, 스카프, 해외여행 중 가우디 박물관에서 직접 샀을 법한 파우치, 등. 쓰시던 물건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



90세 권사님은
이제 나는 물건이 별로 필요 없다며
인생을 정리 중이라 하셨다.



젊은 날 연애하던 얘기며 간호사로 일하던 일화들을 바로 어제일처럼 재미지게 말씀하시던 분이, 정리한단 말씀도 인생 스토리의 일부처럼 이야기하셨다.



늘 사랑해 주시던 권사님이 하늘나라 다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이 번졌다. 그간에 받은 은혜가 쌓여 있었다. 인생 정리란 것이 물건을 버리고 나누는 것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불필요한 욕심은 비우고, 관계는 보듬고, 믿음 소망 사랑의 유산은 흩뿌리고 떠나려는 발걸음을  지그시 바라본다.



받은 금가락지를 낄 때마다 나도 인자하고 따스하게 주변을 살피며 살아갈 마음을 다진다.



물려받은 진짜 빈티지들


D-1


아이들 방이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감기에 걸려 골골거리며 아이들에게 스스로 치우게 했다.


초등학생 남아는 이걸 말끔히 치우기 전까지는 피파게임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더니 이틀 만에 정리 완료했다.


 미취학아동 여아는 혼자서 치우길 어려워해서 도와주...지 않고 한 번에 20개씩 정리하고 뽀로로 한 편 관람을 허락했다. 뽀로로 다섯 편을 보고 나니 방이 어느 정도 깨끗해졌다.





48일간의 필사적인 이삿짐 정리가 끝났다.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비웠고, 눈에 거슬리던 짐더미를 해체했다. 책장을 재정비했고 철 지난 교구는 팔았다. 옷장을 세팅했고, 장난감을 장롱 속에 수납했다.


미처 끝내지 못한 것도 있다.

냉장고 정리를 못해서, 저 안에 외계 생명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팬트리에 수납도구를 사야 하고 주방의 소형가전들을 정돈해야 하며 감자나 고구마, 쌀 같은 식료품 수납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다이어리 같은 최고 난이도의 추억 비움은 많이 미흡했다.

아참! 가구 배치도 다시 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 전체가 루틴을 만들어

함께 깨끗한 집을 유지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다음 연재는 미완의 미션 중 일부를 골라

실험하는 일상의 기록으로 돌아와야겠다.

조금 질서가 잡힌 모습으로

2024년은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읽어주신 여러 독자님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덕분에 썼고 덕분에 치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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