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이상이 높다 보니 그것을 실현해 내기 위해 필요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원하는 만큼을 이룰 자신감이나 자기 확신이 부족할 때면 움직이지 않는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다.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다... 결국 그런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희미하게 알아차리다, 아차! 하는 사이 기회를 흘려보내고, 실력과 기술은 녹슬고, 아무것도 못한 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기도 한다.
내 얘기다. 그렇게 놓친 글감들이 얼마며 쓰지 못한 이야기가 머릿속에만 몇 권인지.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라도 깨달아서.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은 그냥 대충이라도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백지 앞의 막막함을 딛고서 마음에 안 드는 첫 문장이라도 끄적이고, 아무 말이라도 적어서 어쨌든 나아가 보는 것.
짐정리도 마찬가지다.
D-20
숙원사업이 있었다. 현관 앞에 쌓아둔 짐더미. 마음까지 무겁게 했다. 처음에는 외출을 할 때마다 눈에 거슬렸다. 지저분해 보여서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민망해했다. 하지만 아이 둘을 키우며 남편을 도우며, 새롭게 이사한 곳에서 적응해 나가는 동안 여유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정리는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온전히 시간을 할애해야만 완벽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단한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는 부담스러운 장벽이 마음에 세워져서 자꾸만 미루고만 싶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브런치 연재를 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더 이상 도망을 치지 못하고, 쌓인 박스들을 억지로 개시했다.
오늘은 워밍업이다. 곰팡이가 슬지는 않았으나 볕 본지 오래된 짐들이 '휴'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현관문 비번이 생각이 안 나서 밖에서 10분을 서 있었는데, 1년 전에 꽁꽁 싸 놓은 애들을 무슨 수로 기억하고 있겠나. 슬슬 뒤지면서 '아! 이게 여기 들어가 있었구나! 찾아서 다행이네' 정도만 하고 마무리했다.
D-19
75L 종량제 봉투를 하나 준비했다. 고민하지 말고 팍팍 버려야지 결심했다. 미련이 많은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절반이라도 비울 수 있으니. 지난 큐티책과 주보, 문제집, 헌책방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책들을 지류함에 넣었다.
박스 하나 치우는 데 1시간 정도 걸렸다. 엇!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거대한 짐더미 앞에서 가졌던 두려움은 허상이었나? 이 까지 것을 1년 동안이나피해 다녔단 말인가? 혹시 지금 머뭇거리는 모든 일들이 그런 건 아닐까?
재회해서 반가웠던 물건들
D-18
결연했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모수첩과 아기수첩은 놔두고 아이의 짧은 글 기록들도 보관하기로 했다.
이런 아이의 기록을 못 버려서 문제
오래된 가방과 다리미는 비웠고, 고기판은 대체 언제 다 쓴다고 남편이 저렇게 대량으로 쟁여놓은 것일까 가슴을 쳤다.
마스크를 쓰고 치우는데도 먼지를 하도 많이 마셔서 칼칼해진 목을 달래느라 생강차 속 생강까지 씹어먹고 잤다. 짐정리가 보통 일은 아니네.
D-17
꽂을 곳이 없어서 박스채 밖에 있었던 전집.강력 유선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한 권 한 권 생분해되는 물티슈로 닦다가 포기할 뻔했지만 간신히 끝내고, 완벽히 번호대로 정리하려는 욕구는 잠시 버리기로 했다. 대충대충 할 일에 진을 쏟으면 진도를 못 나간다.
현관 바깥 짐을 치우기 위해서는 팬트리 정리가 연동되어야 한다. 한 단을 통채로 비워야 책을 놓을 수 있다. 가장 쉽게 치울 수 있는 만만한 곳을 골랐다. 여기 저기서 받은 수많은 에코백을 헌옷함에 비웠다. 또, 마트에 가서야 생각나는 장바구니는 미리 현관과 자동차 트렁크에 배치했다.
폐지 박스 하나를 가득히 버렸고 75L 종량제 봉투를 벌써 반 채웠다.
비포 애프터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도 엄청난 시작이라 자부한다. 이제 오른쪽 만큼 남았다. 가속도가 붙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