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뿐한 일상, 정돈된 집, 본질의 삶을 위해 물건을 비우는 미니멀 라이프는 얼마나 해야 정착이 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겐 유난히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찾아보니 나의 첫 비움일기는 2020년 2월 3일 날짜로 기록되어 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 준다는 의미의 '당인정' 온라인 비움 모임에 참여했는데, 리더인 '미소님'의 안내에 따라 하루에 하나 이상의 물건을 비워냈다.
꾸준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두 달쯤 했더니 새로운 감각이 하나 솟아났다. 관성에 의해, 당연하게 늘 그 자리에 놓여있는 물건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도구의 위치를 동선에 맞게 재배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께 물려받거나 지인에게 선물 받아서, 딱히 취향에 맞지 않는데도 그냥저냥 쓰던 물건들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심지어 어느 식당에 가서는 주변환경을 보며 이곳과 저곳을 비워내면 장사가 훨씬 잘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천지개벽한 것처럼 눈이 뜨인 지 3개월쯤 지난 시점에서 우리 집을 다시 둘러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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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천성이 느려서인가, 손대야 할 곳들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착착 정리가 되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더 더 더 비워내야 깔끔한 여백이 생길 텐데
'물건 하나에 추억과,
물건 하나에 사랑과,
물건 하나에 미련과,
물건 하나에 애틋함과,
물건 하나에 가능성'
들이 방해를 했고, 생활에 떠밀린 채 변화가 더디게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에 미소님에게 상담을 받았다.
"저는 3개월이나 됐는데도 왜 이렇게 정리가 안 될까요?"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잘하고 계시는데요.
저는 제대로 비우고 정돈 됐다고 느껴지기까지 2년이 걸렸어요."
미니멀라이프의 고수이자 우리끼리는 한국의 곤도 마리에라고 부르던 그녀조차 2년씩이나 걸린 일이었다니,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하긴 40년어치의 생이 어떻게 3달 만에 바뀌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비움은 지속되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는데, 그래도 머리 한 편에는 늘 군더더기 없는, 슬림한 일상을 상상하고, 지향하고, 다짐하며 살았다.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숙성시키고 성숙될 때까지 기다린 결과, 과거 집착형 인간(초등학교 일기장까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인 나는 추억의 옷들을 하나씩 떠나보내고 딱 3개만 남겼다.
1. 21살 풋풋했던 시절의 멜빵바지(연식있는 사람만 아는 GV2) / 2. 애정했던 디자이너 마소영(지금은 활동을 안 하는 듯)의 자수 스커트 / 3. 첫 면접복
D-26
연재 6화> [토해내는 책장을 정리하며]에서 거실 복도에 있는 책장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책들이 아직도 많다. 물려줄 책들을 모았다.
정리란 것이 깔끔하게 하는 일인데,
과정 자체는 깔끔하지가 않다.
한 번 일 해서 딱 떨어지게 매듭지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다. 곳곳에 숨어 있던 짐들이 복병처럼 불쑥 또 나타난다.
어제 한 칸 비웠는데, 갑자기 다음 날 택배로 두 칸어치의 물려받을 옷이 도착한다. 어린이집에서 한 보따리 받아오고 교회에서도 자꾸 뭔가를 받아온다. 물건의 과잉 시대다. 필사적이지 않으면 현상유지도 안 된다. 그 조잡한 과정을 지나야 한다. 원래 그렇다. 인정하기로 했다.
D-25
어린이책 76권과 쇼핑백 21개, 헌 옷 5벌을 비웠다.
책을 준다면 거절하지 않는 친구에게 전달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 용품은 70% 이상 물려받아서 썼는데 이것도 궁합이 맞아야 함을 느꼈다.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거지만 상대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 마음으로 건넸음에도 짐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물어보고 필요한지 묻는다. 친구네 아이가 받은 물건을 보고 환호하면 정말 기분 좋다. 우리 집에서 추억을 쌓아준 물건이 그 집에서도 즐거운 한 때를 만들어 줄 거란 생각에.
D-24
우리 집 딸은 광개토 대왕 같은 면모가 있다. 자기 취향의 소품들을 전시하고, 늘어놓고, 계속 확장시켜 나간다. 이렇게 영역을 만든 곳이 여럿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방에서만 하더니 안방에도, 거실에도 한 구석씩 자꾸 늘려가서, 이제는 제지를 해야 한다.
하원한 딸이 기절!!!이라며 소리쳤다.
어제는 엄마가 책들을 잔뜩 담아서 나가는 걸 목격했던 터라, 오늘 장난감을 쇼핑백에 넣고 있으니 불안감이 엄습했나 보다. 딸이 내게 뭐 하는 건지 따져 물었다. 여기가 너무 너저분해서 쇼핑백에 담아 깨끗하게 장롱에 보관한다고 했다.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이다.
저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예전엔 한숨부터 나왔지만 이제는 방법을 안다. 감당이 안 되거나, 너무 막막하거나,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물건들을 마주할 때는 과감히 리빙박스나 대형 장바구니에 쓸어 담으면 된다. 그 후 베란다나 장롱에 넣어놓자.
일단 눈에 보이는 부분은 깨끗해져 있고, 잠시 치워둔 박스는 찬찬히 시간이 날 때 정리하면 된다. 기억에서 없어지면 필요 없다는 증거다. 혹은 비움을 위해 내가 정서적 시간이 필요했듯, 아이도 장난감과 정 떼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 과정을 통해, 때로는 장난감과 재회할 때 마치 새로운 선물을 받은 듯 기뻐할 수도 있고, 혹은 시시해져서 이젠 누구 줘도 된다고 덤덤하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각 맞춰 정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후자는 커다란 쇼핑백에 한꺼번에 담았다.
왼쪽은 오늘 넣어 놓은 장난감들, 오른쪽은 이사오면서 넣은 장난감들인데 한 번도 꺼내 놀지 않았다. 조만간 비워야겠다.
이런 보류의 공간에는 당근에 올려놨는데 거래가 안된 걸 대기시켜 넣을 수도 있고, 비울까 말까 고민되는 것도 일단 둘 수 있다.마구잡이로 섞인 카오스도 제한적으로 가두어 놓는다.
어떻게 보면 비움도 일종의 상실인데 이성적으로는 불필요하다고 알면서도 마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완충작용을 해 주는 시공간을 마련함으로 여유를 얻게 된다.
6개월 이상 보관한 그녀의 작품은 사진을 찍어 놓고 몰래 버리거나 현관에 걸어줬고, 필요없는 식기건조대는 당근 나눔 즉시 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