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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Dec 08. 2023

감당 안 될 때, 막막할 때, 보류할 때의 정리법

짐정리 일지 D-26,25,24



가뿐한 일상, 정돈된 집, 본질의 삶을 위해 물건을 비우는 미니멀 라이프는 얼마나 해야 정착이 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겐 유난히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찾아보니 나의 첫 비움일기는 2020년 2월 3일 날짜로 기록되어 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 준다는 의미의 '당인정' 온라인 비움 모임에 참여했는데, 리더인 '미소님'의 안내에 따라 하루에 하나 이상의 물건을 비워냈다.





꾸준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두 달쯤 했더니 새로운 감각이 하나 솟아났다. 관성에 의해, 당연하게 늘 그 자리에 놓여있는 물건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도구의 위치를 동선에 맞게 재배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께 물려받거나 지인에게 선물 받아서, 딱히 취향에 맞지 않는데도 그냥저냥 쓰던 물건들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심지어 어느 식당에 가서는 주변환경을 보며 이곳과 저곳을 비워내면 장사가 훨씬 잘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천지개벽한 것처럼 눈이 뜨인 지 3개월쯤 지난 시점에서 우리 집을 다시 둘러봤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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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천성이 느려서인가, 손대야 할 곳들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착착 정리가 되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더 더 더 비워내야 깔끔한 여백이 생길 텐데


'물건 하나에 추억과,

물건 하나에 사랑과,

물건 하나에 미련과,

물건 하나에 애틋함과,

물건 하나에 가능성' 


들이 방해를 했고, 생활에 떠밀린 채 변화가 더디게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에 미소님에게 상담을 받았다.


"저는 3개월이나 됐는데도 왜 이렇게 정리가 안 될까요?"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잘하고 계시는데요.

저는 제대로 비우고 정돈 됐다고 느껴지기까지 2년이 걸렸어요."



미니멀라이프의 고수이자 우리끼리는 한국의 곤도 마리에라고 부르던 그녀조차 2년씩이나 걸린 일이었다니,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하긴 40년어치의 생이 어떻게 3달 만에 바뀌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비움은 지속되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는데, 그래도 머리 한 편에는 늘 군더더기 없는, 슬림한 일상을 상상하고, 지향하고, 다짐하며 살았다.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숙성시키고 성숙될 때까지 기다린 결과, 과거 집착형 인간(초등학교 일기장까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인 나는 추억의 옷들을 하나씩 떠나보내고 딱 3개만 남겼다.



1. 21살 풋풋했던 시절의 멜빵바지(연식있는 사람만 아는 GV2) / 2. 애정했던 디자이너 마소영(지금은 활동을 안 하는 듯)의 자수 스커트 / 3. 첫 면접복



D-26


연재 6화> [토해내는 책장을 정리하며]에서 거실 복도에 있는 책장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책들이 아직도 많다. 물려줄 책들을 모았다.


정리란 것이 깔끔하게 하는 일인데,

과정 자체는 깔끔하지가 않다. 

한 번 일 해서 딱 떨어지게 매듭지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다. 곳곳에 숨어 있던 짐들이 복병처럼 불쑥 또 나타난다.


어제 한 칸 비웠는데, 갑자기 다음 날 택배로 두 칸어치의 물려받을 옷이 도착한다. 어린이집에서 한 보따리 받아오고 교회에서도 자꾸 뭔가를 받아온다. 물건의 과잉 시대다. 필사적이지 않으면 현상유지도 안 된다. 그 조잡한 과정을 지나야 한다. 원래 그렇다. 인정하기로 했다.





D-25


어린이책 76권과 쇼핑백 21개, 헌 옷 5벌을 비웠다.

책을 준다면 거절하지 않는 친구에게 전달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 용품은 70% 이상 물려받아서 썼는데 이것도 궁합이 맞아야 함을 느꼈다.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거지만 상대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 마음으로 건넸음에도 짐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물어보고 필요한지 묻는다. 친구네 아이가 받은 물건을 보고 환호하면 정말 기분 좋다. 우리 집에서 추억을 쌓아준 물건이 그 집에서도 즐거운 한 때를 만들어 줄 거란 생각에.





D-24


우리 집 딸은 광개토 대왕 같은 면모가 있다. 자기 취향의 소품들을 전시하고, 늘어놓고, 계속 확장시켜 나간다. 이렇게 영역을 만든 곳이 여럿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방에서만 하더니 안방에도, 거실에도 한 구석씩 자꾸 늘려가서, 이제는 제지를 해야 한다. 


하원한 딸이 기절!!!이라며 소리쳤다.


어제는 엄마가 책들을 잔뜩 담아서 나가는 걸 목격했던 터라, 오늘 장난감을 쇼핑백에 넣고 있으니 불안감이 엄습했나 보다. 딸이 내게 뭐 하는 건지 따져 물었다. 여기가 너무 너저분해서 쇼핑백에 담아 깨끗하게 장롱에 보관한다고 했다.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이다.


저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예전엔 한숨부터 나왔지만 이제는 방법을 안다. 감당이 안 되거나, 너무 막막하거나,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물건들을 마주할 때는 과감히 리빙박스나 대형 장바구니에 쓸어 담으면 된다. 그 후 베란다나 장롱에 넣어놓자.


일단 눈에 보이는 부분은 깨끗해져 있고, 잠시 치워둔 박스는 찬찬히 시간이 날 때 정리하면 된다. 기억에서 없어지면 필요 없다는 증거다. 혹은 비움을 위해 내가 정서적 시간이 필요했듯, 아이도 장난감과 정 떼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 과정을 통해, 때로는 장난감과 재회할 때 마치 새로운 선물을 받은 듯 기뻐할 수도 있고, 혹은 시시해져서 이젠 누구 줘도 된다고 덤덤하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각 맞춰 정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후자는 커다란 쇼핑백에 한꺼번에 담았다.


왼쪽은 오늘 넣어 놓은 장난감들, 오른쪽은 이사오면서 넣은 장난감들인데 한 번도 꺼내 놀지 않았다. 조만간 비워야겠다.

이런 보류의 공간에는 당근에 올려놨는데 거래가 안된 걸 대기시켜 수도 있고, 비울까 말까 고민되는 것도 일단 둘 수 있다. 마구잡이로 섞인 카오스도 제한적으로 가두어 놓는다.


어떻게 보면 비움도 일종의 상실인데 이성적으로는 불필요하다고 알면서도 마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완충작용을 해 주는 시공간을 마련함으로 여유를 얻게 된다.


6개월 이상 보관한 그녀의 작품은 사진을 찍어 놓고 몰래 버리거나 현관에 걸어줬고, 필요없는 식기건조대는 당근 나눔 즉시 성사






모든 일이 그럴 게다.

전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묵혀서, 숙성되는지 썩는지 두고 보자.



아이들이 다음번에 장롱을 열면 어떤 반응을 할까?


오늘은 서랍 속에 오래 있던 글감을 하나 꺼내봐야겠다.

얼마나 영글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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