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봉란 Dec 05. 2023

정리 못하는 것도 유전이 되나요?

짐정리 일지 D-30,29,28,27

아들 방


우리 집 아들은 아기 때 2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울었다. 밤잠이 없는 야행성 아기로, 주변 환경을 깜깜하게 해 놓아도 불 끈 방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거리며 수면부족의 엄마를 미치게 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싫어했고, 겁이 많아 낯선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을 경계했다. 남자아이인데 민감하고 섬세해서 엄마의 말투에 묻어나는 한숨이나 화를 잘 알아챘고, 태권도 같은 건 절대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아기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구를 탓하랴, 그저 내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읊조렸다. 그 모든 성향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엄마인 '나'에게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MBTI 검사를 함께 해 봤는데, 성향마저 똑같이 나왔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갈 때 간당간당하게 가고 숙제는 벼락치기로 하며, 대신 한 번 집중할 때는 놀랍게 몇 시간이고 파고드는 몰입의 힘이 있다. 내심, 날 닮지 않기를 바랐다. 본인의 단점을 잘 알고 있어서, 아들은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삶을 살았으면 싶었다. 이 녀석도 분명 J 보다는 P 성향이 강한 것이 틀림없다.


정리를 하라고 시킬 때는 어떤가?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책정리 좀 하거라." 시키면, 책을 조금 주워 꽂다가 이내 한 권 펼쳐서 세월아 월아 그 책을 끝까지, 아니 그 책 시리즈까지 다 꺼내서 끝장을 보고야 만다. "잡동사니 서랍 좀 정리하렴." 하고 뒤돌아 보면, 서랍 속에 자기가 만들었던 옛 작품들을 감상하느라 정리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겨 놓는다. 결혼하기 전까지 딱 내가 그랬다.


개구리 올챙이 적을 생각하니 혼내기 어렵다. 하지만 나처럼 서른이 넘은 나이까지 정리정돈을 못하는 어른으로 크게 둘 수는 없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자라는 동안 학업이나 전공에만 집중하느라 일상 생활력을 훈련하지 못해 늦깎이 생활인이 되는 과정에 땀을 뺐다. 나의 삶을 답습하게 둘 수 없어, 아이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매우 장려하고 있다.


세스퀴 탄산으로 냉장고 얼룩 닦고 있는 아들



정리를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해 주기로 했다. 먼저 옷장부터 세팅했다. 최대한 아이가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상의는 무조건 옷걸이에 말려서 그 채로 옷장에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바지는 큰 바구니에, 속옷과 양말, 잠옷, 운동복은 각각 라벨 붙은 장소에 모셔 넣기만 하면 된다. 어렵게 접는 과정을 최대한 생략할 수 있게  준 결과, 빨래 건조대에서 자기 옷을 가져다가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는 책과 장난감 정리 시스템을 만들 차례다.



D-30

서랍 한 칸만 정리해도 기분이 다르다.


아이들의 서랍은 비움을 위한 금광같은 곳이랄까


하루에 5개씩 비움 하는 모임에 참여할 때, 가장 손쉬운  아이의 서랍 칸을 열어서 골라내는 것이었다. 카오스의 방을 보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데, 소소하게 서랍 한 칸부터 시작하면 금세 가속력이 붙는다.


D-29

공친 날.

주일은 쉽니다. 아니, 주일은 바쁩니다.

비움을 위한 에너지가 부족했던 날.


D-28


정리를 해보니, 이렇게 쉬이 너저분해지는 원인이 파악된다. 애들이 책을 읽고 나서 바로바로 제자리에 꽂아놓기만 해도 정리정돈을 위한 고생의 절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위치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이것도 라벨을 붙이거나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하여 제자리에 대한 공동 합의가 이루어져야겠다.


D-27


물건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주인에게 시위를 했을 것이다. 왜 목욕을 시켜주지 않냐고.


이케아 만능 트롤리



애들 키우는 집에 흔하게 있는 트롤리다. 아무거나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많은 집에서 잡동사니 쓰레기통이 되기 쉽다. 우리 집 트롤리는 수 년째 책과 미술도구들, 그림 쪼가리에 파묻혀 바닥을 드러내지 못했다.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속에 물건들을 다 드러내고 샤워를 시켰다. 깨끗한 트롤리를 보며, 이곳에 무엇을 넣을지 마음속에 정확하게 떠올렸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취미 용품, 미술 도구들이다. 이곳에 오일 파스텔과 수채화 물감, 붓, 도화지, 색연필 세트, 모자이크 준비물, 등. 이제야 오랫동안 멈추어 있었던,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작업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짐정리를 하며 내년을 구상할 때, 명확한 바람들이 생긴다. 이런 것을 "정리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INFP든 ESTJ든, 후천적으로 노력고 있는 나도, 선천적으로 정리를 못하는 아들도, 환경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또 유지해 나가며, 함께 배워가는 중이다. 아들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취미는 장비빨이 필요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