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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Dec 27. 2023

꼭 미니멀리스트가 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짐정리 일지 D-13,12,11,10,9,8,7,6

짐정리의 동력이 슬슬 떨어지고 있던 와중에 친구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찾아가도 늘 집이 깔끔한, 신뢰할만한 조력자다. 우리는 함께 하얀 라텍스 장갑을 끼고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거대한 책장 앞에 서서 버릴지 말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내게, 그녀는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채찍질했다.


"버려!"



깔끔녀는 저런 것들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살이를 하며 원룸들을 전전했으니, 추억의 물건들을 짊어지고 사는 건 사치였다.


반대로 나는 결혼하자마자 지방으로 이사했다. 처음 신혼집을 구할 때 부동산에서 보여준 곳은 어느 빌라의 꼭대기 주인층이었다. 운동장 같은 거실과 그만큼의 옥상까지 모두 쓸 수 있는 60평대의 집이었는데 전세가격이 8천이었다. 겨울 난방비 걱정에 계약하진 않았다. 아무튼, 서울을 벗어난 도시의 자애로운 집값에 감동했다. 공간적인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환경에 정착하니 나는 애써 물건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학생 때부터 쓰던 유리책장 하나를 그대로 신혼집에 옮겨왔다. 그 안에는 6살 때부터 연주해 온 바이올린 악보들, 전공서적, 앨범 등이 있었다. 그분을 11년 동안 여기저기 그대로 모시고 다녔다.



악보 꺼낼 때 외에는 열어보는 일이 드물었다. 이번에 서울로 다시 오면서 집을 좁혀 오느라 책장은 버리고 내용물만 박스에 담아왔다. 깔끔녀와 함께 샅샅이 톺아보며 남길 것과 버릴 것을 분류했다. 제삼자인 그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버려도 되는 로 보여 재활용박스에 넣기 바빴고, 난 핑계인지 명분인지를 모를 남겨야 할 이유를 댔다. 그녀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안 그랬음 진도를 못 나갔을 것이다.



그때,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 초등학교 일기장을 발견했다. 한 장씩 넘기는데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어린 나의 기록에 걸려 넘어졌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6학년, 13살, 저렇게 글을 똥덩어리보다 못하게 쓸 때에도 작가에 대한 꿈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잔잔한 전율이 일었다.



그동안, 여러 것들을 버리지 않고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 보면 40년 전 캘리포니아에 스티브 잡스가 살던 집에 '차고'라는 여유공간이 있어 애플이 탄생될 수 있었단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의 차고; garage는 물론 주차하는 공간의 주요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포괄적인 기능을 아우른다. 팬트리와는 또 다른 창고의 역할이 다. 팬트리는 음식재료나 생필품 재고를 정돈되게 보관하는 곳이라면 '가라지'는 이런저런 잡동사니, 혹은 고물들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유현준 교수는 구석구석 최대의 효율을 끌어올려, 비는 공간 없이 설계하는 요즘의 아파트나 원룸공간보단 '낭비되는 허술한 공간'을 통해 얻는 여유가 창의성을 기르는 배경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럴 때 천재도 길러지는 거라고.


그리하여 나는 대단히 많은 것들을 비우면서도 어린 시절의 때 묻은 조각들을 일부 살려주었다. 현관 바깥, 덤의 공간에  잉여의 물건들을  남겨놓았다. 앞으로 쓰게 될 영감과 글감의 저장고가 되어줄 거라 믿으며.

미니멀라이프와는 약간 거리를 두며.


그래도 깔끔녀 덕에 많이 비웠다






D-13


무질서는 노력 없이 찾아오지만 질서는 인위적인 손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큰 짐 정리까지 할 힘이 없어서 한 뼘 둥지파괴라도 했다.

(*둥지파괴 : 물건이나 잡동사니들이 서로 붙어서 둥지를 이룬 곳들을 말끔하게 치우는 것 by 비채나쌤)


이것만 해도 훨씬 살만해진다. 기분이 좋아진다. 눈에 보이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다.


D-12


오래도록 간직한 소설들을 꺼냈다. 신앙서적도 몇 권 버렸다. 어떤 책은 청년들의 선생이라고 칭해지는 목회자의 저서였다. 읽으면서 열정은 인정하되 저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미디어에서 그의 성추문 사건들을 확인했다. 세월의 검증을 통해 한 사람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나는구나.



20여 년 전에 졸업했음에도 아직 꽂혀 있던 전공서적들을 버렸다. 서양음악사, 대위법, 화성법, 국악개론. 언젠가 다시 보지 않을까, 그래도 전공인데, 하며 놔둔 책들과 이별했다. 나의 살림 스승은 말씀하시길, 이런 정리는 한 시절에 안녕을 고하는 일이라고. 20대의 종말은 진작에 마무리했어야 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저 책들을 버리고 나면, 졸업하고서 살리지 못한 전공의 흔적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던 것 같다. 이제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됐다.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했다. 만약 100세까지 산다면, 그동안 한 번이라도 다시 들여다볼 것인지. 답이 명확해졌다.



더 오래된 유물들도 나왔다. 닮고 싶었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안네소피무터의 공연 팸플릿들, 고등학교 때 열심히 필기했던 노트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순정만화, 원수연 작가의 풀하우스 일러스트 표지 공책이 살아 있었다. 디카프리오 오빠가 로미오였던 리즈시절이 담긴 노트, 멋진 킬러 레옹도.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에 오정연 아나운서가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버리지 못한 물품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대학수첩과 수능 성적표까지 간직하고 있는 모양이 똑같았다. 그녀의 심정에 공감했다. 열심히 살았던 흔적들이 예뻐서 버릴 수 없는. 





과거의 반짝거렸던 영광은 현재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가끔은, 엄마로 살면서, 아이들 똥 닦아 주다가 인생이 다 흘러가버릴 것 같은 순간들에는 조금 쓸모가 있다. 노인들이 곶감 꺼내 먹듯 추억을 소환해 사는 것처럼, 엄마도 때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힘을 내기도 한다.


75 리터 종량제 봉투를 꽉 채워 버렸다.
비포 애프터


D-11


정리의 고수에 이르러야만 할 수 있다는 가구 비우기!

서랍들을 텅 비웠다. 안방의 한 구석을 훤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D-10


물러줄 옷가지와 책이 끊임없이 나온다.

꽃은 버릴 때가 난감하고요.

악보들에게 새로운 귀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케아 빌리 책장 + 유리도어

D-9,8,7,6


엄마와 아내, 딸, 누나의 타이틀이 중요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정리를 착착 진행하면 좋으련만 일상에서 아이들은 계속 늘어놓고, 외부 행사, 집안 대소사들이 복병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일보 전진에 이보 후퇴다. 솔직히 육아 경력이 10년이 되다 보니 그런 날이 특별하지도 않다. 아주 흔하고 평이하다. 연재도 하루를 통으로 빼먹을 정도로 너무 바빴다. 이래서, 엄마는 목표나 꿈을 포기하고 주저앉기 참 쉽다는 생각을 하며 시무룩해졌다.



야심 차게 48일간의 필사적인 완벽한 정리를 계획했으나 실패할 것 같아 남편에게 고했다.

"아무래도 돈을 써야겠어. 남들도 돈을 쓰고 정리하는 이유가 다 있네. 도저히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

정리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맡기는 것 외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앗! 그런데 돈을 쓴다는 말이 남편에겐 갑자기 사이렌처럼 들린 것일까? 그가 (이제야) 갑자기 열의를 보이며 정리정돈에 임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질 않나 설거지를 해놓질 않나. 자신이 적극 도와줄 테니 잘 마무리해 보자고 타이른다.



그의 결심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이 연재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길 다짐하며

파이팅!


아침부터 합심하여 치운 아름답게 깨끗한 안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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