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사회자가 갖춰야 할 덕목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 초대받아 참석한 행사장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분이 나직이 내뱉은 말이다.
오전 11시 시작 예정이었던 행사는 이미 30분 가까이 지연된 상태였다.
장내 여기저기서 참석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행사 사회를 볼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초대받은 내빈으로,
어떤 날은 한 명의 참석자로 객석에 앉아 있기도 한다.
직업병이랄까.
무대 위에 있지 않을 때도 사회자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떤 멘트를 하는지,
말의 호흡은 어떤지,
시간 배분은 적절한지.
그렇게 관찰하다 보면 훌륭한 사회자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가 뚜렷하게 보인다.
행사 시작이 늦어지는 동안 사회자는 스몰토크로 어색한 공기를 바꾸려 애쓰고 있었다.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며 청중의 불만이 최대한 터져 나오지 않도록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그 수고로움을 알기에
사회자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응원을 보냈다.
날씨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고,
진행 순서와 이 행사의 의미를 짚어가며 청중들이 기다림에 지루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
'아, 이 사람 베테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행사가 이미 30분이나 지연됐다는 사실을 잊은 듯 보였다.
내빈이 무대로 오르는 그 짧은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본인의 사족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내빈이 인사를 마치고 내려갈 때도,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보일 때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 ooo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 부분이 참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사실 제가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참 많습니다. 아, 그리고 저기 뒤에 계신 분들도..."
"정말 감명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사실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요..."
이미 예정된 종료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사회자는 마치 이 무대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듯 기어이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 애썼다.
사회를 보다 보면 무대 위에서 쉽게 빠지는 착각이 있다.
마이크를 잡고 수백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간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나'라는 착각이다.
사회자가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
무대 위에서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 두려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
'나는 말도 잘하고, 재미있고, 이 자리를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진행 경험이 많은 사회자일수록 이 함정에 더 쉽게 빠진다.
경험이 쌓이면서 애드리브라는 무기가 생기고, 그걸 쓰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잘 먹혔던 멘트를 또 사용하고, 청중의 반응이 좋았던 농담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점점 더 자신이 행사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은 권력을 갖는 일이 아니다.
책임을 지는 일이다.
사회자의 역할은 명확하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참석자들이 각 순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전부다.
행사의 주인공은 연사다.
발표자다.
시상자와 수상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다.
사회자는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조명이어야지, 스스로 빛나려 해서는 안 된다.
마이크는 무대를 채우라고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잘 흘러가도록 비워두라고 맡겨진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프로 사회자다.
그렇다면 무대 위에서 나를 비우고 행사를 빛내는 사회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사회자의 말에는 '용도'가 있어야 한다.
사회자의 말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필요한 말이어야 한다.
멘트를 꺼내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 번만 물어보면 된다.
이 말이 없으며 행사 진행에 문제가 생길까.
사회자의 말은 크게 세 가지를 넘지 않는다.
다음 순서를 안내하는 말,
분위기를 잠깐 환기하는 말,
그리고 꼭 전달해야 할 정보.
그 외의 말들은 대부분 없어서 행사는 잘 흘러간다.
개인적인 감상, 아침에 있었던 일, 연사에 대한 장황한 평가.
그 말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2. 애드리브는 '능력'이 아니라 '조절'의 문제다.
애드리브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있다.
무대 동선이 길어질 때,
기술적인 문제로 잠시 멈춰야 할 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하지만 애드리브에도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 '이 행사'의 이야기일 것.
청중이나 다음 순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말이면 충분하다.
3. 행사 전체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지금 시간이 지연되고 있는가, 여유가 있는가.
청중의 집중도는 어떤가.
다음 순서는 얼마나 중요한가.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면 사회자의 임무는 하나다.
최대한 빨리, 매끄럽게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것.
내 경험상 행사의 80~90%는 예정보다 길어진다.
그러니 사회자의 기본 마인드는
'어떻게 시간을 채울까'가 아니라
'어떻게 시간을 절약할까'여야 한다.
4. 청중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무대 위에서는 조명 때문에 객석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앞줄 몇 사람의 표정만이라도 읽어라.
시계를 보고 있지는 않는가.
핸드폰을 꺼내 들지는 않았는가.
자리를 뜨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가.
청중의 반응은 사회자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장 정직하게 알려준다.
진짜 좋은 반응은 청중이 다음 순서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자세다.
행사에 계속 집중하고 있는 표정이다.
결국 마이크는 나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시간과 시간을 조용히 연결하는 도구여야 한다.
사회자가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프로그램의 여백을 정성껏 메울 때,
비로소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무대 위에서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오로지 행사의 성공과 청중의 편안함을 위해 말을 덜어낼 줄 아는 절제.
이것이 바로, 프로 사회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