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당신에게

우리는 왜 듣기보다 말부터 하게 될까

by 커리어포유

20년이 훌쩍 넘은 인연들이 함께하는 모임이 있다.
말과 글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들이라 그 자리는 늘 활기가 넘친다.

누군가 말을 꺼내면 그 말 위로 또 다른 말이 얹히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여러 갈래로 동시에 흘러간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고,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보태고,

누군가는 그 경험을 다시 다른 이야기로 이어 간다.

말과 말이 부딪히는 광경.
낯설지 않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자리가 조금씩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돌아오는 길에 딱히 또렷하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이유를 곱씹어 보게 됐다.

왜 이렇게 많은 말을 나눴는데 대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문장도 남지 않았을까.

그 질문이 하나의 생각에 가 닿았다.

'우리는 왜 듣기보다 말부터 하게 될까.'


말이 직업인 사람들에게 침묵은 곧 '방송 사고'와 같다.

오디오가 비는 불과 몇 초의 정적조차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직업적 강박은 일상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먼저 떠올리고,

대화 사이에 아주 작은 공백이라도 생길라치면 본능적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를 얹는다.

그것이 상대를 향한 배려이고, 분위기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익숙한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누고 있던 말이 정말 소통이었을까.

그저 각자가 자기 역할을 꽤나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전문가'라는 이름이 익숙해질수록 대화는 조금씩 무대처럼 변해간다.

누군가 고민을 꺼내면 그 마음에 함께 머무르기보다

어떤 조언이 가장 적절할지, 어떤 반응이 좋아 보일지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상대가 힘들다고 말해도 그 곁에 조용히 있기보다는 그 감정을 멋지게 정리해 줄 '알맞은 말'을 찾느라 분주해진다.

그 말은 다정해 보이지만 돌이켜보면 그 상황을 마주하기 불편한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을 잘하기 위해 정말 많은 기술을 배워왔다.

호흡, 발성, 발음, 글의 구조, 음성표현...

하지만 정작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알아보는 감각은 충분히 익히지 못했다.

오랜 시간 스피치 강의를 해오며 조금씩 알게 된 게 있다.

말의 힘은 크게 울리는 목소리나 잘 다듬어진 문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나오기 전 잠시 멈춘 시간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진짜 대화는 입을 여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시작된다.

상황을 한 번 더 살피고,

상대의 호흡을 가늠하며,

지금은 말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말을 덜어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상대의 눈동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지점,

말과 말 사이에 남아 있는 여운,

이 자리가 답을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지에 대한 미묘한 공기 같은 것들.

그때부터 말은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 곁에 조심스럽게 놓이기 시작한다.

어떤 자리에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고,

어떤 순간에는 침묵을 함께 견뎌주는 선택이 가장 진심 어린 대답이 되기도 한다.

침묵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다.

상대의 말이 더 나올 수 있도록 내 말을 잠시 내려놓는 선택에 가깝다.


우리는 말을 잘하려 애쓰느라 사실은 말이 필요 없었던 순간들을 너무 쉽게 지나쳐왔다.

스피치의 완성은 화려한 언변에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말을 아끼기로 한 그 여백 속에서 대화는 더 깊어질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순간,

그때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의 그 좁은 틈에 비로소 제대로 서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