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가 말의 품격을 결정한다
요즘 나는 신승훈의 노래에 푹 빠져있다.
얼마 전 새 앨범이 나왔고, 11월엔 전국 투어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35년째 이어지는 그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마음을 묘하게 흔든다.
틈날 때마다 그의 노래를 반복 재생하며 예전 앨범부터 최신곡까지 천천히 다시 듣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오래된 노래 하나에서 멈췄다.
바로 〈내 방식대로의 사랑〉.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던 중, 가사 한 줄이 내 귀를 잡아끌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난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예전엔 너의 눈만 봐도 알 수가 있었어
…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틀려진 거야.
‘틀려진 거야.’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 한 단어에서 멈췄다.
‘틀려진’은 사실 틀린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라진 거야’가 맞다.
‘틀리다’는 잘못되었다는 뜻이고, ‘다르다’는 같지 않다는 뜻이다.
‘틀리다’와 ‘다르다’는 단어 하나 차이지만, 그 의미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틀리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말,
‘다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말이다.
‘틀리다’는 논리의 언어이고,
‘다르다’는 관계의 언어다.
설득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상대의 생각이 틀렸다고 이해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상대의 생각도 존중하되 내 생각이 더 낫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물론 두 번째 방식이 훨씬 쉽다.
사람은 ‘틀리다’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방어하지만,
‘다르다’는 말 앞에서는 귀를 연다.
즉, 상대를 꺾으려 하지 말고 함께 바라보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진짜 설득이다.
‘틀리다’는 논쟁을 만들고,
‘다르다’는 대화를 만든다.
‘틀리다’로 시작된 말은 싸움을 낳고,
‘다르다’로 시작된 말은 설득을 낳는다.
언젠가 스피치 수업 중 토론을 주제로 얘기할 때였다.
한 교육생이 토론의 정의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서 발표했는데, 이어서 발표하는 교육생의 첫마디가
"전 좀 틀린 것 같아요."였다.
그 말이 끝나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어색해졌다.
나는 조용히 말을 바꿔주었다.
“선생님은 좀 다르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제야 대화의 온도가 부드러워졌던 기억이 난다.
의도가 같더라도 단어 하나가 다르면 말의 결과가 달라진다.
‘틀리다’는 판단이고, ‘다르다’는 존중이다.
스피치의 품격은 때로 단어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정확한 단어가 메시지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 정확성이 곧 신뢰가 된다.
말을 잘한다는 건 유창하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확하게 표현하는 태도다.
정확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추는 그 태도,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는 그 마음,
그게 바로 스피치의 본질이다.
정확한 말은 기술이 아니라 책임이다.
언어를 바로 세운다는 건, 곧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신승훈의 노래 속 ‘틀려진 거야’는 문법적으로는 틀렸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도 정확했다.
‘달라진’보다 ‘틀려진’이라는 단어가 감정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든다.
서로의 마음이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틀려버린 느낌.
그 문장에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해 버린 우리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언어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말의 정확성은 결국 마음의 정직함이다.
어제는 한글날이자 나의 생일이었다.
말하는 일이 업인 데다 한글날이 생일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운명 같다'고 하신다.
그래서 한글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다.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한글은 어렵고, 말은 여전히 깊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좋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정확한 말, 조금 더 따뜻한 말을 배우려 노력한다.
정확한 말은 진심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그게 결국,
내가 평생 배우고 싶은 '틀리지 않은 말하기'다.
그리고 그 말 위에서 오늘도 다시 나를 다듬는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한 문장을 위해,
내가 전하고 싶은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또 한 번의 한글날을 보내면서 생각한다.
내가 전하는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감싸주길.
그 마음으로, 오늘도 다시 말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