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의 기본기 - 발음 편
"아리아, ○○○○으로 가자."
"몇 번째 장소로 갈까요?"
"아니, ○○○○으로 가자니까?"
"몇 번째 장소로 갈까요?"
친구는 점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결국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하고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내비게이션에 음성으로 장소를 입력하려던 친구는 번번이 실패했고, 보다 못한 내가 대신 말했다.
"아리아, ○○○○으로 가자."
그러자 단번에 정확한 경로가 화면에 떴다.
당황한 친구가 나를 보며 말했다.
"EC... 왜 내 말은 몬 알아듣고 니 말만 알아듣는데..."
'그 이유를 진짜 모른단 말야?ㅋㅋㅋ'
보이스 트레이닝 수업에서 자주 듣는 고민이 있다.
"제가 말하면 사람들이 자꾸만 '뭐라고요?'라고 되물어요. 어떻게 하면 발음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하나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발음이 흐려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입은 겨우 열고, 혀는 대충 움직이고, 말은 빨리 끝내려 하니 소리가 뭉개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경상도 사투리에서 "관광"이 "간강"으로 들리는 이유도 같다.
'ㅗ+ㅏ'를 분명히 연결해서 발음하지 않고, 'ㅗ'를 생략하고 바로 'ㅏ'로 넘어가니 발음이 무너진다.
결국 발음을 고치려면 입술과 혀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운동 전에 스트레칭을 하듯, 발음에도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발음을 할 때는 입술뿐 아니라 얼굴 전체 근육이 다 쓰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조음기관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
<조음기관 풀어주기>
1. 손바닥의 아랫부분을 이용해서 볼 전체를 마사지한다.
자극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 근육을 조금 강하게 풀어주는 것이 좋다.
2. 두 뺨을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5초간 그대로 멈춘다.
귀 아래쪽이 당기는 느낌이 들도록 바람을 가득 넣는다.
3. 두 입술에 힘을 빼고 공기를 가볍게 내보내면서 입술을 '푸르르~~' 떤다.
잘 안 되는 경우 양쪽 검지로 입술 옆을 살짝 누르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다.
4.'오'와 '아' 입모양을 크고 확실하게 하면서 혀로는 "똑딱똑딱" 소리를 여러 번 낸다.
소리보다 입 모양에 좀 더 집중하자.
5. 입술을 오므리고 앞으로 쭉 내민 상태로 돌린다.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를 반복한다.
6. 혀를 길게 내밀었다 접었다를 반복한다.
혀를 최대한 길게 내밀었다 목구멍 쪽으로 말아 넣는다.
7. 이로 혀를 잘근잘근 씹어준다.
혀 근육을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아프지 않을 정도로 씹어준다.
8. 혀로 입안 구석구석을 핥아준다.
5번과 마찬가지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를 반복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얼굴 근육이 풀리면서 발음이 한결 수월해진다.
워밍업이 끝났다면 이제는 발음을 결정짓는 다음 네 가지 요소를 기억하자.
이 네 가지만 챙겨도 발음은 확실히 달라진다.
첫째, 입술 모양
발음이 뭉개지는 가장 흔한 이유는 입을 크게 벌리지 않기 때문이다.
입술만 살짝 움직이면 소리가 입안에만 맴돌며 웅얼거리는 듯 들린다.
거울 앞에서 "아. 에. 이. 오. 우"를 과장되게 발음해 보자.
얼굴 근육까지 움직일 정도로 입을 열면 소리의 선명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입만 크게 벌려도 발음은 70% 이상 개선된다.
둘째, 혀 위치
발음은 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자음을 발음할 때는 혀끝이 어디에 닿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ㄷ.ㅌ.ㄸ' 소리는 혀끝이 윗니 바로 뒤 잇몸 돌출 부위(치경, 흔히 '치조'라고도 불리는 부위)에 정확히 닿아야 또렷하다.
반면 'ㅅ. ㅆ' 소리는 혀끝이 치아에 직접 닿지 않고 치경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되 닿지 않은 상태에서 공기를 통과시켜야 맑은 소리가 난다. 이때 좁은 틈으로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특유의 마찰음이 생긴다.
혀가 치아에 닿으면 '쉬~'같은 흐린 소리가 되고, 압력이 지나치게 걸리면 'ㄷ'처럼 굳어버린다.
치아 사이로 빠져나가면 영어의 'th' 소리처럼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랑해"를 "따랑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들어본 적 있을 거다.
혀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ㅅ' 소리가 'ㄷ' 계열로 바뀌는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자음을 발음할 때는 혀끝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를, 마치 정확한 버튼을 누른다는 느낌으로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발음은 훨씬 또렷해진다.
셋째, 턱관절
턱이 열리지 않으면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없는 음가들이 있다.
귀 밑 움푹 들어간 곳에 손가락을 대고 "카. 커. 코", "삭. 석. 속"을 발음해 보라.
이때 턱관절이 확실히 움직여야 소리가 제대로 나온다.
턱이 굳어 있으면 소리가 답답하고 작아진다.
반대로 턱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닫히면 발음은 훨씬 분명해진다.
말을 할 때 턱관절이 충분히 움직이고 있는지, 작은 습관만 점검해도 발음은 크게 달라진다.
넷째, 말의 속도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속도가 빠르면 소리는 뭉개질 수밖에 없다.
입술, 혀, 턱이 움직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면서 발음이 쉽게 무너진다.
이럴 때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0.8배 정도만 늦춰보자.
말이 조금만 느려져도 입술과 혀가 제자리를 찾고, 발음은 훨씬 또렷해진다.
발음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정확히 움직이고, 턱을 유연하게 열고, 속도를 조절하는 작은 습관.
이 습관들이 쌓여 어느 순간, 또렷하고 믿음직한 목소리로 변해간다.
그 순간 청중은 더 이상 당신에게 "뭐라고요?"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발음!!!
제대로 알고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좋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