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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Jan 14. 2023

[diary] 선택의 무게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우리나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가 될 때까지, 자신이 어떤 전공을 택할 것인지 하나의 큰 선택만 한다면, 그 이외에 요소들은 매우 틀에 짜인 과정을 따라서 진행된다. 의대에서는 수강신청 전쟁이 없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대에서 정해놓은 과목들을 모두 다 같이 이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6년의 의과대학 시절을 마치고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새내기 의사가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병원에서 1년의 수련의(인턴)와 3-4년의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전문의가 된 이후에는 건강한 남자라면 3년의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 시절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전문의가 되어서도 요즘은 1-2년의 펠로우 과정을 추가로 거친다. 이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나면 남자라면 30대 중반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약 15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어떤 전공을 택할지를 제외하고는 커리어적인 측면에서는 나의 앞길을 선택해야 하는 고민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과정을 마치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대학병원에 남을지, 아니면 병원과 계약을 맺고 급여를 받는 봉직의 생활을 할지, 아니면 개업을 통해 나의 병원을 운영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이 중에서 봉직의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일해야 할 병원을 정하는 데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병원의 위치와 근무 조건, 급여, 휴가 일수, 근무 내용이 병원마다 모두 조금씩 다르다. 월등히 근무조건이 좋은 병원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고,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운 좋게 내가 선택한 병원이 나와 잘 맞으면 좋지만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 틀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한다.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가볍고, 틀린 선택을 하더라도 내 인생의 방향성과는 관련이 없는 작은 선택부터, 1년 혹은 그 이상을 일해야 하는 직장을 선택하는 일, 내가 살 집을 선택하는 일, 배우자를 선택하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일까지, 내 인생의 큰 선택들은 30대 초반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울할 땐 뇌과학'의 저자 앨릭스 코브에 따르면 우리가 선택하기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1) 우리는 각각의 선택에 어떤 '결점'이 따를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고, 2) 대체로 내가 내린 선택에 확신을 가질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미래를 예측하고 그중에서 나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하고 선택을 내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우울증에 걸리면 뇌 속에서 '불안'의 영역이 확장된다. 심각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한데 선택을 하라고 하면 더 불안해지고 선택에 확신을 가지기가 더 어렵다. 내가 내린 선택의 부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긍정적인 측면은 무시한다. (근무 조건과 급여는 좋은데 직원식당 밥이 맛이 없으면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자책한다) 불안이 다시 가중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책의 저자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 그럭저럭 괜찮은 선택을 하라'라고 조언한다. 일단 선택을 하게 되면, 내가 내린 선택에 맞추어 행동이 조절되고, 나 자신에 대한 통제감이 생기며, 불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직을 앞두고 근무할 병원을 알아보는 중이다. 처음에는 일을 쉴 까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구인정보를 들여다보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여러 병원에 연락을 해 보았고, 그중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병원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무언가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불안을 낳고 있다. 책을 읽고, 마인트 컨트롤을 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면 쉬어도 된다고 생각도 해 보지만 상황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불안과 스트레스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나는 선택의 무게를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끼고 있다.


1) 최선이 아닌 그럭저럭 괜찮은 선택을 하고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자

2) 선택을 내리면서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고려하지 말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에 집중하자

3) 섣부른 선택을 하지 말고, 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


글을 써 놓고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질 때마다 계속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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