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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Mar 08. 2023

우울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드디어 우울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우울증을 겪으면서 느꼈던 '우울'에 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대여섯 가지 정도의 다양한 심리 상태를 동시에 겪었다. 그중 다른 다양한 증상에 관해서는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지만 우울에 관해서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울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이자 때로는 신체적 상태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상태를 이해할 수 없고, 회복이 된 이후라면 그때의 상태를 다시 복기하는 일도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우울감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나 나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삽화의 시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1. 상실과 고립

연인과 헤어지거나 친한 친구와 절교를 한 경험이 있는가. 그동안 나와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안정감을 주던 사람을 앞으로는 만나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는 타인이었지만 나의 일부였고, 그가 차지하던 내 마음속 한 공간은 이제 텅 빈 공허로 남게 되었다.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형태로 누군가를 나의 인생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우울 삽화 시기에 이러한 상실은 내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난다. 지금까지는 나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그리고 타인들이 있었다면, 이제 이곳에서는 나와 타인뿐이다. 나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도, 나눌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절벽에서 나를 잡아 주던 손을 모두 놓치고, 깊은 구덩이에 나 혼자 갇혀있는 것만 같다.


2. 좌절감과 절망감

한 움큼 남은 에너지가 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음의 상태는 이미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나의 노력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나는 이 구덩이에 혼자 갇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렇게 회복에 대한 희망을 잃고 좁은 시선으로만 미래를 바라보는 것을 '터널 시야'라고 한다) 노력은 좌절이 되고, 좌절이 반복되면 절망이 된다.


3. 답답함

하루 종일 가슴이 무언가에 짓눌리고 조여드는 것 같다. 어떤 순간에는 이것이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매우 잠시 이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결국은 이 느낌으로 돌아온다. 다리에 무거운 추가 달려 깊은 물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것 같다. 팔을 허우적거려 보면 잠시 가라앉는 게 멈추지만 가만히 있으면 다시 또 밑으로 내려간다. 사방에서 몸을 압박하는 것 같고 이 느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일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즐거운 일을 찾으려고 해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몸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서 움직일 수가 없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도, 몸을 씻고 옷을 고르는 일도 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내가 느낀 우울증의 가장 본질적인 증상이 이 답답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4. 우울과 슬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의외로 슬프지는 않았다. 아니 슬프지 않았다기보다는 다른 기분들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슬픈 영화를 보고서 느끼는 감정이나 누군가를 잃어서 느끼는 슬픔과는 다르다. 그저 무기력하고 답답한 내 상태가,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 처지가 다만 슬프고 우울하다.


나의 부족한 글 솜씨로는 우울을 이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읽기에 따라서 처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별로 가감이 없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써 보았다. 나의 우울은 그래도 의학적 범주로 본다면 경하거나 약간 심한 정도의 우울이었다. 심한 중증 우울삽화는 그 깊이와 지속 시간이 내가 겪은 것보다는 더할 것이고,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그 세계에 대해서는 나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지금 나는 살아가면서 즐거움도 느끼고, 자주 웃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조금은 우울하고 그것보다 약간 더 무기력한 경우가 많다.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지금은 정체를 겪고 있는 단계이고, 어쩌면 여기까지가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슬퍼진다. 하지만 우울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면서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생각하면 다시금 작은 용기가 생긴다. 나는 많이 괜찮아졌고, 더 많이 괜찮아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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