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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Mar 02. 2023

불안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의식의 흐름대로 써 보는 불안 이야기.


오랫동안 매일 마셔왔던 술을 끊었을 때 나는 매우 심한 불안감을 겪었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철렁하고 내려앉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잠시 집중을 하면서 불안을 잠시 잊었다가도 다시 불안감에 마음이 잠식되어 왔다. 증상은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심하고, 저녁이 되면 나아졌다. 낮 시간 동안은 참기 힘들어 항 불안 효과가 있는 진정제를 복용했다. 마음이 잠시 차분해졌지만 약의 효과는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심한 불안은 일주일에서 열흘정도 지속되다가 다행히 조금씩 나아졌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불안이 최근 다시 찾아왔다. 불안의 원인을 굳이 찾으려 한다면 곧 마주하게 될 퇴사와 이직일 것이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이직이다. 많은 고민 끝에 2주간 휴식을 하기로 하고 다음에 일을 할 곳도 결정했다. 지금보다 장점도 있고(집에서 약간 가깝고, 분위기상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과 교류가 많을 듯하다. 급여가 약간 올랐고, 좀 더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주는 아니지만 주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단점도 있다(지금보다 일이 많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많다는 것은 내 개인의 시간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불안할 때마다 장점을 떠올리려고 노력하지만 금세 단점들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서 자리 잡는다. 일이 너무 많아서 적응을 못 하면 어떡하지? 같이 지내는 사람들과 관계가 나빠지면 어떡하지? 초반에는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텐데 잘 극복할 수 있을까?


원인이 있는 불안함도 있지만 원인이 없는 불안함도 있다. 멍 하니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생각이 든다.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 특별히 즐거운 일도, 절망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삶. 거창한 목표도 없고 성취감도 없다. 대출금은 천천히 줄어들고 있지만 청산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술을 줄이고 나니 저녁 시간을 조금 더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술이 주는 안락함과 이완은 이제 자주 느끼지 못한다. (물론 안락함은 잠시이고 불면과 숙취가 주는 마이너스가 더 크다)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다면 (물건을) 사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던가. 이번에 새로 차를 샀다. 새 차를 사는 건 처음이고 차량을 인수해서 돌아올 때는 신나고, 흥분되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 죽일 놈의 불안감은 여기서도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지금 차를 산 일이 잘한 일일까? 오래되긴 했지만(출고된 지 15년 된 차다) 그래도 아직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데 지금 이 시점에 새 차를 사야만 했을까? 하자가 있지는 않을까?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차를 사는 행복의 순간에도 이 놈의 불안은 꼭 숟가락을 올려야지만 속이 시원했을까?


불안에다 대고 화를 내는 일이 온당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건 내 몸이고 내 감정이니까 누 위서 침 뱉기다. 하지만 오늘은 의식의 흐름대로 쓰기로 했으니까 한 마디 해 본다.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숟가락을 올리는 불안이라는 놈 같으니. 내 쫒으려고 하면 할수록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서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직업병이 또 도져서 책을 찾아본다.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aty disorder)가 생겼나? 아니면 불안과 우울이 같이 나타나는 혼합형 불안 및 우울장애(mixed anxiaty and depressive disorder)인가? 알코올 금단에 의한 증상인가? 물론 이런 걸 고민해 봤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번엔 치료법을 찾아본다. 항 불안제로 쓰이는 벤조다이아제핀 계열의 약을 먹으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약은 약하지만 의존성이 있고, 계속 사용하다 보면 같은 용량에서 효과가 줄어들어 복용량을 늘려야 되는 경우도 있다. 항우울제는 필요에 따라서 충분히 복용하는 것이 좋지만 항 불안제는 지금 당장 좋다고 영양제 마냥 먹어도 되는 약은 아니다. 인터넷을 찾아본다. 음, 견과류와 마그네슘이 뇌 속에서 진정 작용을 하는 GABA라는 물질의 농도를 올려 준다고? 당장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큰 효과는 없었다. 나는 또 플라세보는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전문용어로 피암시성이 부족하다) 아 정말 내 성격 피곤하다.


결론은? 허무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약이다. 내 불안의 상당 부분은 이직에 관한 스트레스이고, 이로 인한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유도해서 증상을 심화시킨다. 이직을 해야지 불안이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과거의 경험들을 반추해 보자면 그렇게 희망적일 일도, 그렇게 절망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 님아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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