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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Feb 09. 2023

무가치감과 죄책감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와이프가 아이를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가고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너무 못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건강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술을 자제하지 못해서 우울증에 걸렸고, 성급하게 약을 끊다가 다시는 겪기 싫었던 두 번째 우울 삽화를 지나가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고 입원 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당장 생활에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미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육아를 함께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이 너무 부끄러웠고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끝없는 자기 비하는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고 우울한 기분은 더 깊은 자기 비하의 늪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무가치감, 또는 지나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이 거의 매일 지속됨
 (Feelings of worthlessness or excessive or inappropriate guilt nearly every day)


주요 우울장애의 아홉 가지 진단기준 중 하나로 무가치감과 죄책감이 포함되어 있다. 우울한 기분은 누구나 가끔씩은 느끼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무가치감과 죄책감을 마주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의 유무가 우울감과 우울증을 나누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부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해냄으로써 자기 존중감과 가치감이 생길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만약 내가 하던 일이 더 이상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실직을 통보받는다면 누구나 우울감과 허무함,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느끼는 무가치함은 이러한 외적이 요인 없이도 불안정한 심리 상태 때문에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찾아온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다 하는 일은 나는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낮에는 우울감 때문에 일을 하기 힘들었다면 저녁에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잘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무가치감이 찾아왔고 가족, 친구, 직장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억울하거나 힘든 일을 당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 탓'을 우선 하게 된다. 권고사직을 당한다면? 에이 거지 같은 회사. 나도 이 회사에서 일하기 싫었어. 상사도 마음에 안 들고, 출퇴근도 멀고, 월급도 작고. 거기 아니면 내가 갈 데가 없냐?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지 한 번 지켜볼 거다. 이런 '남 탓'은 상처 입은 자아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응급조치와도 같은 것이다.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마음에 임시로 버팀목을 세워 쓰러지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 마음이 회복된다면 객관화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나를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은 '남 탓', 조금 더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외부로의 분노 표출이 잘 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이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의 불씨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이는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남아서 화살의 방향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게 된다. 자아존중감이 떨어지고, 하루종일 스스로를 책망하고, 무가치감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나의 마음을 붙들어 준 것은 결국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나 대신 누군가를 욕해주고, 잠시 쉬었다 가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탱해 주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더 단단하게 굳어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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