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반가운 선물처럼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제목부터 알 수 있듯, 이 영화 역시 진짜 주인은 사라진 채 엉뚱하게 주고 받아지는 편지가 소재거든요. 단순히 소재로서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편지가 하는 역할, 영화의 분위기, 구성 모든 게 유사해요. 몇몇 장면은 실제로 러브레터를 자체 오마주하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러브레터의 주연배우가 부부 역할로 출연하는 장면까지 있죠. 간만에 러브레터의 감성에 빠져들고 싶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영화일 겁니다.
만화가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도란도란 살고 있는 유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언니에게 도착한 동창회 초대장을 전달받습니다. 잠시 고민하지만 유리는 언니의 소식을 전할 겸 동창회에 참석하기로 해요. 그런데 세월이 너무 흐른걸까요.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은 유리를 언니 미사키로 착각하며 환대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유리는 동창회 자리를 급하게 벗어나요. 그때 한 남자가 유리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자신을 소설가라 소개한 남자는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주길 간곡히 청해요. 불편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 든 유리는 전화번호만 남긴 채 때마침 다가온 버스를 타고 자리를 뜹니다. 그러자 곧장 그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그 문자는 유리의 마음을 거세게 흔듭니다.
복잡한 감정을 숨기며 집에 귀가한 유리는 아뿔사, 핸드폰 관리에 소홀했다가 수상쩍은 그 문자를 남편에게 들키고 맙니다. 자신을 언니로 착각하고 보낸 문자라며 해명해보지만 실랑이 끝에 핸드폰은 망가져 버려요. 이 망가진 핸드폰이 엉뚱한 편지의 시작점이 됩니다. 더 이상 문자를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소설가 남자와 아직 나누지 못한 대화가 있던 유리가 그에게 받은 명함 속 주소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거든요. 그 남자 쿄시로 역시 반갑게 답장하죠. 여기에 어쩌다보니 미사키의 딸과 유리의 딸까지 정체를 숨긴 채 끼어들게 되면서 그야말로 기묘한 편지 랠리가 이어집니다. 대화의 주제는 온통 미사키인데, 정작 주인공인 미사키는 없는 채로 말이죠. 어쨌든 이들의 편지로 비어 있던 미사키의 과거들이 조각조각 채워져 갑니다.
이 영화 속 우리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존재는 단연 미사키입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한 번도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를 대변하지 않지만, 오히려 부재로써 그녀가 쿄시로에게, 유리에게, 그리고 딸에게 드리우고 있는 존재감을 증명합니다. 미사키의 인력에 속절없이 말려들어간 이들은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 언저리를 맴돌며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요. 그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생각하고 추억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미사키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편지의 진짜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십수년 전 학창시절, 언니에게 첫 눈에 반한 선배 쿄시로에게 유리가 말합니다. 러브레터를 써 보는 게 어때요? 제가 전달해줄게요. 무척이나 어긋나 있는 말입니다. 사실 러브레터를 쓰고 싶고, 받고 싶은 건 유리 자신이었는데 말이죠. 수많은 세월을 뛰어넘어서야 그녀는 펜을 들고 사랑했던 쿄시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언니의 이름으로 시작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며 끝내게 될 편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리의 얼굴로 쿄시로를 온전히 마주하고 그 시절 청하지 못했던 악수로 인사를 전합니다. 거대한 언니의 그림자 속에 마무리되지 못했던 감정에 안녕을 고하는 거죠.
한편, 유리의 말이 촉매가 되어 사랑에 빠진 고교생 쿄시로는 정말로 편지를 씁니다. 길고 절절한 편지이자, 차마 유리가 본인 손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두게 될 편지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제 주인을 찾아가게 될 편지이기도 하죠. 이 편지의 주인은 미사키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그 사이 미사키와 쿄시로는 교제하고 이별합니다. 쿄시로는 이별의 후유증을 뜨겁게 앓으며 첫 소설 <미사키>를 쓰게 되죠. 꽤나 호평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한 쿄시로는 그러나, 이후 다른 소설을 쓰지 못해요. 쿄시로는 그의 소설이 미사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주인인 미사키가 사라지자 더 이상 쓸 수 있는 얘기가 없어진 것이죠.
그러나 미사키 아닌 미사키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는 점차 소설을 그의 것으로 만들어 가게 됩니다. 쿄시로가 썼던 절절한 러브레터들은 당연히 미사키의 것이지만, 그가 소설로 쓴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주인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그가 만나게 된 미사키의 분신들은 쿄시로에게 책에 사인을 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제목이 '미사키'여도, 이 책의 주인은 쿄시로이기에, 미사키의 여동생, 미사키의 딸, 그리고 미사키의 전남편의 처까지 동일한 부탁을 하죠. 쿄시로는 어색해하면서도 서걱서걱 자신의 이름을 책에 새깁니다. 이것은 쿄시로에게 일종의 증명이자, 다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미사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스트 레터>는 미사키라는 거대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 사라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자리를 다시 제대로 찾아 가도록 응원하는 영화에요. 쿄시로는 이야기의 주인인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유리는 과거의 감정을 매듭짓고 가정으로 복귀하며, 유리의 딸은 짝사랑하는 친구가 있을 그녀의 학교로 돌아갑니다.
마지막으로 미사키의 딸 아유미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녀는 사실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 그녀가 벗어나야 할 자리가 있다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여자의 딸이라는 위치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학대와 방치, 병 들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성장해 온 아유미에게 쿄시로의 존재는 일종의 도피처였습니다. 그가 찾아와주길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렸죠.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인 것 같지만, 사실 엄마는 끔찍히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게 아유미에겐 커다란 위안이었을 겁니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아유미는 결국 그의 마지막 인사를 엄마에게 전합니다. 마지막에나마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셈이죠. 그와 함께 아유미 역시 '불행한 여자의 딸'에서 '어느 시점에 불행하기도 했지만 또 언젠가는 뜨겁게 사랑받고 행복하기도 했던 여자의 딸'이 된 겁니다. 그제야 아유미는 엄마가 남긴 라스트 레터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졸업 축사, 그러니까 한 시절을 끝내고 새로운 시기로 나아가게 됨을 축하하는 편지를 말이죠.
오늘 우리들은 졸업식을 맞이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우리에게 있어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목표는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아직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생의 선택지가 있겠지요. 이 자리에 있는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걷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괴로운 일을 겪게 될 때 살아가는 일이 고통이 될 때 분명 우리들은 몇 번이고 이 장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가능성이 무한하게 여겨졌던 이곳을, 모두가 한결같이 소중하게 빛나고 있었던 이 장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