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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Feb 13. 2023

비싼 카메라와 푸딩과 언니

좋아하는 순간을 기억하기 #3

지난주에는 좋아하는 언니를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고 좋아하는 동생들이 새로 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어. 나는 약속을 두 번이나 파투 냈고, 일정을 여러 차례 수정한 끝에 겨우 우리는 만났어. 언니가 근처에 전시가 있다고 그걸 보자고 해서 하루를 아주 알차게 보낼 예정이었어.


우리는 11시에 문을 여는 멕시칸 타코집에서 만났어. 같이 밥을 먹고 전시를 빨리 본 후에 카페로 가기로 했는데, 이게 웬걸. 타코집 바로 맞은편에 푸딩 맛집이 있다는 거야. 12시 오픈이라 불이 꺼진 푸딩 맛집을 보자마자 시간을 확인했지. 11시 57분. 푸딩을 먹으면 일정에 지장을 줄까? 언니 우리 푸딩 먹고 갈래요? 언니는 당연히 좋다면서, 포장까지 하겠다고 말했어. 그날의 푸딩은 정말... 맛있었고.


내가 약속을 몇 번이나 파투 낸 게 미안해서, 밥도 커피도 다 내가 사겠다고 했는데, 언니는 더치페이하는 사이가 오래간다며 절대 반씩 내자고 했어. 진짜 밥과 커피도 디저트도 다 사고 싶지만 가정 살림을 생각하면 큰돈이니 부담이 되었던 나의 속마음은 언니의 제안이 너무 고마웠어. 사실 내가 끝내 돈을 다 냈어도 언니를 좋아했을 테지만.


내가 베를린에 있을 때,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거든. 거기서 만난 동료와 함께 베를리너 인터뷰집을 만들자고 기획을 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나는 카메라가 없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언니가 한국에서 곧 나를 만나러 들어올 예정이던 동생을 통해 DSLR 카메라를 빌려줬어. 캐논에서 나온 크고 비싼 거 말이야. 그걸로 꽤나 멋진 사진을 많이 찍었고 내 외장하드에 남아 종종 베를린을 떠올릴 때 꺼내보는데, 나는 요즘 비싼 카메라를 베를린으로 보내준 언니의 마음에 대해서 자주 떠올려.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건 좀 그렇지 않냐고 카메라를 보내지 않을 핑계를 찾아낼 어떤 언니들의 얼굴이 생각났거든. 그것만이 아니야. 내가 약속을 파투 내거나 미루거나 하면 재수없게 바쁜 척한다고 하거나 자신이 예약한 비싼 식당의 값을 나에게 치르게 했던 언니들의 얼굴도. 


한때는 결혼을 하고 인간관계가 좀 협소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서로에게 친구이면서 애인이고 보호자이자 경쟁자인 사이와 결혼을 했더니(이 부분에 대해서 남편-당사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음을 밝힘), 다른 관계들과 맺어질 우정이나 환대는 아무래도 조금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먹고 사느라 바쁘고 서로의 환경은 바뀌니까. '원래' 알던 친구나 동료들을 만날 기회는 자꾸만 줄어드는 거야.


아니야. 사실 내가 ENFP였는데, INFP가 되느라 그런 것 같아. 원랜 사람들 만나면서 보고 배우고 듣고 느끼고 모든 에너지를 얻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아니 어떤 언니들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친한 언니들이 많아. 어릴 적에 사귄 친구 말고는 동갑인 친구가 적다고 쓸 생각이었는데, 쓰면서 세어보니 서울에 와서 사귄 동갑 친구는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해. (누가 뒤늦게라도 떠오른다면 어쩌나요....) 그래서인지 좋은-좋아하는 언니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한 언니도 있고 나와 절교한 언니도 있지. 존경하고 좋아해서 잘 따르는 동생의 시간과 돈을 호구잡는 언니들? 그런 언니들을 거치며  INFP가 되었나 싶어. 미움을 받고나면 나는 나를 자책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눈치를 살피거나. 자존감이 없어서 언니들에게 그런 힘을 배우곤 했는데, 좋아하고 존경하는 언니가 그러면 난 내가 백퍼 잘못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지. 


그런 시간을 한참이나 보낸 후에, 하나 깨달았어. 여전히 나를 어여삐 여기는 언니들이 있는데? 나는 모든 언니들이나 친구들에게 똑같이 대했을 뿐인 걸. 나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도 서로를 응원하는 언니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그들의 미움도 원망도 절교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지. 미워하고 싶은 마음만이 미움을 낳고, 원망하는 마음 끝에 절교도 있는 거니까. 내가 뭘 더 잘했어도 그런 마음이 있는 언니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좋아하는-좋은 언니들을 더 만나야지. 서로에게 응원을 보내고 따뜻한 걸 나눠 먹을 수 있는 언니들을.


푸딩은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 중에 하나인데, 그날의 푸딩은 정말이지 끝내줬어. 음료를 꼭 시켜야 한다고 해서 주문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나눠마시던 것도 즐거워. 카메라를 빌려줘서 고마워. 푸딩을 먹자고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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