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준비했던 시험이 끝나고, 훌쩍 베트남 푸꾸옥이라는 아름다운 섬으로 떠났다. 여행 짐을 싸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러닝화를 챙겼다. 시험이 끝난 날부터 마음이 너무 가벼워져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도 추웠고, 영하에서 뛰는 것이 못견디게 싫어진 탓에 계속 나가지 못했었다. 그러기를 몇 일 째, 드디어 따뜻한 섬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여행지에서 신나게 뛰어다닐 생각이 가득했다.
좁은 비행기를 안에서 잠을 설치며 겨우 도착한 푸꾸옥의 날씨는 참 포근했다. 분명 기온은 높았지만, 건기인 덕에 찌는 듯 덥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햇빛은 따뜻하다가 가끔씩 뜨거웠고 그마저도 그늘에 들어가면 금방 서늘해져 산뜻했다. 항상 바다가 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자리잡아 있었다. 투명한 바닷물을 보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내가 여행을 왔구나. 이제 정말 한 단계가 마무리되었구나. 나는 그제서야 진정으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모든 시험이 그렇지만, 이 시험은 유독 마음이 많이 쓰였다. 시험 전 열심히 준비하면서 애가 쓰였고, 시험 중에도 모든 순간에 나의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끝이 나고도 결과가 마냥 만족스럽지 않아, 또 최종 성적과 합격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시험이 끝난 날 저녁, 딱 그 몇 시간 동안은 정말이지 자유로워졌다는 기쁨에 취해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스멀스멀 점수에 대한 연연함이 피어났고, 정체모를 걱정이 마음 깊숙이서부터 올라와 질척거렸다. 참 이상했다. 분명 끝났는데, 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나. 마음 속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싶었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바다를 건너 기대하던 여행지를 오게 되니, 그 걱정마저 한국에 두고 온듯,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한결 쉬워진 마음으로 기대했던 러닝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 천국같이 완벽한 리조트에서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바로 러닝 준비를 했다. 러닝복을 입고, 신발끈을 꼼꼼히 조였다. 갤워치도 차고, 선크림도 듬뿍 발랐다. 그리고 완벽한 러닝 메이트인 W의 지휘 하 꼼꼼한 준비운동 까지 마쳤다. 드디어! 해방의 뜀을 시작했다.
처음 묵었던 리조트는 작은 해변을 낀 오두막같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리조트 안을 한바퀴 돌고, 마을로 나서기로 했다. 리조트를 뛰는 동안 아침에 산책하는 사람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신짜오’라는 베트남 아침 인사를 서로 건내며 당연하듯 미소를 주고 받았다. 코로 들어오는 따뜻하고 촉촉한 공기가 싫지 않았다. 열대는 열대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비오듯 흘렀다. 러닝하며 나는 땀은 퍽 반갑다. 땀이 날때도 상쾌하고, 땀이 바람에 마르면 시원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을로 나서니 아침부터 부지런히 가게를 꾸리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 한적히 수다를 나누는 동네 분들이 드문 드문 계셨다. 헥헥 거리며 뛰는 우리를 물끄러미 보다가도 우리가 먼저 인사를 건내면 망설이지 않고 밝은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노래는 내가 요즘 빠져있는 뉴진스 노래를 틀었고, 버니즈처럼 폴짝 폴짝 뛰었다. 마음의 걱정 같은 것들은 우리의 걸음이 옮겨진 바로 뒤에다 조금씩 버리고 밟아 땅에 내려두었다.
한참 뛰다 보니 마을 오솔길을 벗어나 큰 도로가 나와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같은 코스로 다른 러너들이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숨이 찬 탓에 인사를 말로 하기 어려워 나는 미소를, 그들은 엄지를 척 들어올려주었다. 서로의 활기찬 아침의 시작을 응원하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베트남의 작은 해변 동네를 뛰는 동안 나는 한동안 까먹고 있었던 뜀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동안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여러번 러닝을 했었다. 익숙한 집 옆의 천을 뛰면서 여러 잡 생각이 떠나지 않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도 하였다. 이상하게 장마의 벽지 곰팡이처럼 마음에 조금씩 퍼지는 불쾌한 불안감이 차오를때면 눈을 꽉 감고 전력질주를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면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잠깐 아무 생각이없어져 후련해지다가도 다시 숨이 돌아올때면 어느새 걱정도, 불안도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뛰는 동안에는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감 대신에 약간씩 불안정해지는 호흡에서 설렘과 재미를 느꼈다. 철저한 타인과 응원을 주고 받는 동안,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람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퐁퐁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뒤로하며 뛰면서 내가 드디어 걱정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도착한 러닝 코스의 끝인 파란 바다를 보며 멈춰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내쉬며 내가 드디어 자유롭다고. 더이상 걱정할 것 없이, 두려워할 것 없이 지금 여기서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