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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Apr 23. 2024

우리는 원래 노마드였다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나는 스스로를 확장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네. 그러곤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 금욕하고 관습의 궤도 안에서 안주하고자 하며 우왕좌왕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욕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네.
Ich habe allerlei nachgedacht, über die Begier im Menschen, sich auszubreiten, neue Entdeckungen zu machen, herumzuschweifen; und dann wieder über den inneren Trieb, sich der Einschränkung willig zu ergeben, in dem Gleise der Gewohnheit so hinzufahren und sich weder um Rechts noch um Links zu bekümmern.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평생 키운 여러 마리 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녀석은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 죽은 ‘스콜’이다.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한 살 터울의 형 ‘걸리버’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 유전자의 힘이 세서 그랬는지 두 녀석의 성격이 대조적이었다. 인간의 관점이 반영된 설명일 텐데, 스콜은 배려심이 강하고 다정다감했다. 인간의 관점을 거론한 건, 사람에게만 그랬다는 뜻이다. 개 세계에서는 개인주의자에 가까웠다. 산책 중에 마주친 다른 개들에게 무심했고 서열을 가리려 들지 않았기에 어쩌다 상대가 시비를 걸어도 늘 피했다. 대신 홀로 동네 구석구석을 탐색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보기에 명상을 즐긴 학자형 개였다. 평화주의자의 면모 뒤엔 예민함이 보일 듯 말 듯 자리했을 것이다.


반면 걸리버는 개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먹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개였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개라고 말하기 힘든 건 아마 셰틀랜드 쉽독이란 종의 특성이 작용했기 때문이지 싶다. 셸티라고도 불리는 이 종은 아무리 좋아도 배를 까고 헥헥거리지 않으며 주인이나 사람에게 과하게 치대지 않는다. 걸리버가 사람과 개를 좋아했지만, 종의 특성 때문인지 종종 공원과 골목에서 발생하는 사교에서 점잖게 몸을 대주며 느릿하게 꼬리를 흔드는 행동 이상으로 나간 적이 없다. 그런 우아한 태도가 특히 사람에게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됐다. 스콜은 대놓고 적대감을 표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사람의 손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둘을 함께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면 사람들이 주로 걸리버에게 호감을 보였다. 훨씬 더 인간 친화적이고 대중적인 외모를 갖춘 걸리버가 시선을 모은 게 자연스럽다. 스콜에겐 시샘이 없었고, 걸리버는 인기를 즐겼으니 윈윈이었다.


고 스콜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둘 사이에 차이가 컸다. 타자의 비위를 맞추는 외양과 달리 걸리버는 일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서는 유체이탈에 가까울 정도로 깊은 포기에 빠져들었다. 시쳇말로 포기하면 편하다. 걸리버가 택한 삶의 노선이다.


스콜은 반대였다. 예컨대 걸리버가 잘 때 식구 중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내 아들에게 붙어서 밤새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스콜은 식구의 방을 고르게 돌아다니며 방마다 조금씩 잠을 나누어 잤다. 잠결에 등을 압박하곤 했던 스콜의 살가운 체온이 가끔 기억난다. 무엇보다 예민함과 배려심 때문인지 걸리버보다 스트레스를 확실히 더 많이 받는 게 한눈에 드러났다. 스콜이 걸리버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났지만 저 세상으로 여러 해 빨리 간 이유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빨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걸리버는 여전히 건강하게 먹을 것을 밝히며 누군가가 식사하면 그 앞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앉아 있다. 얻어먹을 게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바람처럼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는 것도 예전과 마찬가지다.


걸리버


두 개의 성격 차이가 베르테르가 말한 두 인간형과 당연히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마 개도 그렇겠지만, 인용문에서 말한 전자의 방황형과 후자의 안주형이 극단적인 예외를 빼곤 통상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 비율이 개인의 삶과 나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내 삶을 돌이켜봐도 극적이진 않지만 변화가 확인된다. 사춘기 이후 30대의 어느 나이까지는 크게 보아 방황형의 삶을 살았다. 지나고 보니 그래봤자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다는 자평은 잠시 제쳐 두자. 방황하는, 인용문에 따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정처 없이 배회하는“ 버릇은 어려서 완연했다. 나를 낳기 몇 년 전에 시골에서 숟가락 몇 개 들고 상경한 부모님은 도회지에서 자리를 잡느라 내가 어렸을 때 이사를 자주 다닌 편이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면 짐을 풀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별로 친구가 없는 데다 특히 동네 친구가 없는 까닭은, 이사를 많이 다니기도 했지만 동네와 친해지려고 했을 뿐 동네의 사람들과는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다른 유형의 친구라고 많은 것이 아니지만 동네 친구는 한 명도 없다. 방황이든 배회이든, 그것이 홀로 하는 것이지 더불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진대 그렇다면 어릴 적 나는 제대로 동네를 싸돌아다닌 셈이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수준의 방황 혹은 배회는 질풍노도기에 일어날 법한, 당시엔 과격하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이 아닌, 그래도 당시 기준으론 더 고양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서진 못했던 것 같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Holden)처럼 제도권의 자장에 ”붙들린“ 채 청춘의 장식 같은 방황을 모색하고 또 모색하다가 잦아들었다. 남들처럼 나도 어른이 됐다. 그러면서 물리적 방황이 머릿속의 배회로 전환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삶의 궤적을 다시 훑어보니 그렇게 단언할 것이 아니다. 집안 내력으로 당뇨병이 발병한 이래 많은 중년이 그러하듯 가능한 한 식사 후에 걷는다. 권장 걸음 수 이상을 채우는 날이 많다. 자전거 없이, 스콜이 살아있을 땐 스콜을 데리고, 스콜이 죽고 나선 그의 형이 걷기를 싫어하기에 홀로 걸었다. 20살 무렵에 왼쪽 발목을 심하게 삔 후유증으로 어쩌다 왼발이 불편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중년 이후에 걷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선호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누군가 제대한 아들의 새 전투화를 준다고 하기에 치수를 물어보고는 받아서 실제로 신고 다닌다. 다시 물리적 방황이 시작됐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배회라고 할 수는 없다. 열량과 혈당을 없애기 위한 합목적적 보행은 배회가 아니다. ”스스로를 확장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정처 없이“ 또한 목적 없이 떠돌아야 지금 논하는 의미의 배회이다. 그러므로 아무튼 나의 배회는 끝난 게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방황도?


방황은, 바람과 달리 끝난 건 아닌 듯하다. 여전히 불확정한 상황에 뛰어들기도 하고, 그래서 후회하고 실수하는 그런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옛날로 치면 세상의 지혜를 나누어주어야 할 나이가 되었건만 무지에 있어서는 젊음을 유지한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무는“ 설렘과 기다림이 사라졌고, 내부의 열로 몸에 불이 붙을 것 같아 장맛비를 냉각수로 받아들이는 긴급처방이 필요하지 않다.


물이라고 치면 얼핏 표면이 잔잔해진 것 같다. 하나 물결이 없다고 물속까지 잔잔한 것은 아니다. 그 아래에서 여전히 물길이 있어서 이리저리 흐르고 때로 격류가 만들어진다. 수면으로 치솟는 용승류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때로 용승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흐름이 사라진 물은 살아있는 물이 아닐 테고, 살아있는 물이라면 내가 원하는 흐름만을 만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한시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 바다에서는 하층수가 표층수를 밀어내고 올라오며 많은 영양물질을 함께 끌어올려 해양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비유로 받아들이면 삶에서도 그렇다. ‘적당한’이란 단서를 붙여야 하는 게 난점이지만, 실수는 성장의 자양분이다. 게다가 우격다짐으로 말하면 인간이란 종족은 원래 노마드였다. 떠남의 욕망이 인간의 본성에 들어있다.


네덜란드의 소설가 겸 여행작가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는 세스 노터봄의 책 『유목민 호텔(Nomad’s Hotel)』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자주 인용된다.


“존재의 근원은 움직임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부동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니, 존재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원천인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정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도 그 피안의 세계에서도.”


저자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12세기 아랍 철학자 이븐 알 아라비의 말을 인용했다. 노마드 종족인 인간의 숙명을 간파한 금언이기에 여행애호가가 아니어도 가슴에 와닿는다. 그의 말대로 기왕지사 여정이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라면, 우왕좌왕하지 않고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도 해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안주도 어차피 잠정적인 것일 테니 말이다. 안주의 달콤함에 흠뻑 취해보는 게 찰나라서 더 아름답지 않은가. 스콜이 암에 걸려 죽기 전에 말해줄 것을, 후회가 든다. 피안에서 스콜이 “너나 잘해”라고 말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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