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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May 14. 2024

완두콩을 세나 편두콩을 세나 매일반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게 종국에 하잘것없지. 자신의 열정과 욕망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돈이나 명예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거머쥐려고 애쓰는 타의의 삶을 사는 건 언제나 바보나 하는 짓이지.      
Alles in der Welt läuft doch auf eine Lumperei hinaus, und ein Mensch, der um anderer willen, ohne daß es seine eigene Leidenschaft, sein eigenes Bedürfnis ist, sich um Geld oder Ehre oder sonst was abarbeitet, ist immer ein Tor.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는 친구를 통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어머니의 바람을 전해 듣는다. 원문은 ‘Aktivität’로 이 단어 자체는 적극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문맥으로는 (어머니가 베르테르에게 바라기를) 베르테르가 무엇이라도 했으면 한다는 전언이다. 베르테르가 그러면 나는 아무 일 않고 지낸다는 뜻이냐고 반박한 걸로 보아 남들이 보기에 무위도식이지만, 자신은 무엇인가(의미 있는 것)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베르테르는 타의에 의한 삶에 질색한다. 자신의 열정(Leidenschaft)과 욕망(Bedürfnis)이 배제된 채 통념을 추수하며 사는 삶을 거부한다. 완두콩을 세나 편두콩을 세나 콩을 세는 건 매일반이고, 세상의 모든 일이라는 게 종국엔 다 부질없다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삶의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기준은 자신의 열정과 욕망이어야 한다는 게 베르테르의 논리이다.     


질풍노도     


완두콩을 세나 편두콩을 세나 콩을 세는 건 매한가지라면 제 열정대로 살아야 한다는 베르테르의 얘기가 틀리지 않아 보인다. 사실 그것 말고 답이 없다. 현실에서 개인은, 외부의 기준 즉 거의 모든 구성원에게 매한가지로 주어지는 사회적 강제에 따른 무엇인가를 거머쥐려고 사는 삶과 베르테르가 “자신의 열정과 욕망”이라고 말한 내부의 기준 또는 내면의 빛을 따라가는 사는 삶 중에서 선택하는데, 내면의 빛이 아닌 사회적 강제에 따른 삶을 사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베르테르는 단언한다.


문득 여기서 드는 본원의 궁금증은,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발휘할 개인의 자유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 같은 거창한 주제와 종국에 연결이 될 텐데, 현실에서 사회적 강제를 돌파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게 전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베르테르가 말한 주체 혹은 주체성이란 게 사실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질풍노도로 점철된 내 사춘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인생을 잘 감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생 자체의 의미를 막 묻기 시작한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를 특별히 예뻐한 어느 선생님 수업 시간에, 전후 맥락은 모르겠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냐”는 황당한 질문을 던지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인용한 질문 앞에 ‘그저’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강하게 질책했다. 세월 탓에 그때 뭐라고 질책했는지까지는 이제 기억에 없다. 질책은, 말 그대로의 질책이라기보다는 제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에서 그 풍경을 복기하면 내 선생님이었던 어느 젊은 교사는, 수업 중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학생에게 받고,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몰라 심히 당황한 와중에, 제자에게 도움이 되는 뭐라도 얘기해야 해서,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안쓰럽고 귀여운 선생님. 수업이 끝나고 얼마나 복잡한 상념에 휩싸였을까. 아무튼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게 질책의 결론이었다. 


그 시절에 종교에도 관심이 생겼다. 극렬한 적그리스도 집안에서 갑자기 성서를 읽고 교회를 나갔으며, 급기야 기도원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가했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여름쯤으로 생각되는데, 고등부 담당 전도사와 신앙 상담을 하다가 나는 홀로 밖에서 더 기도하고 들어오라는 처방을 받았다. 다들 실내로 들어가 교제하는 즐거운 순서를 즐길 때 나는 (자의의 형식을 띠었지만) 억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벌을 받았다. 상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 않으나 자유의지에 관한 초보적 의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억이 나는 듯도 하다. 흔히 말하는 “주 안에서의 참 자유”가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며 한 기도 내용이었다. 


정확한 나이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이상하게 아직 얼굴은 머릿속에서 분명한 30대 전도사가 자신이 확신하지 못한 얘기를 들려주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꼭 그 전도사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확신하지 못한 것을 확신하듯 말해야 하는 게 소임으로 주어질 때가 있기는 하다. 그때 나는 은혜롭게도 심야 산상기도에서 답을 찾았다. 그 전도사의 처방이 주효했다. 하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소설의 베르테르는 “자신의 열정과 욕망”대로 살기로 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열정과 욕망”에 의거하여 살기를 포기했다. 나는 때로 “자신의 열정과 욕망”대로 살았고 때로 그 반대로 살며 이날까지 대충 삶을 이어오고 있다.     


인간의 이중성     


성격이 교만하여 남에게 잘 묻지 않는다.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지식에 관해선 낯 가리지 않고 쉽게 잘 묻는 편이지만 조금 심오한 의문이면 산 사람에게 묻지 않고 보통 죽은 사람에게 묻는다는 뜻이다. 질풍노도기에 선생님이나 전도사에게 끼친 민폐를 다른 사람에게 더 끼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런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 


남의 곤경을 덜어주었지만 내 곤경을 피하지는 못했다. 삶의 궤적이 꼭 내 의지대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보니,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의 답을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때가 늘어난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나 고등학교 때 전도사처럼 답을 말해야 해서 말할 때가 대부분이다.


(애매한 분류로) 문하생과 개인과 구조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다. ‘구조와 행위주체[structure and agency]’와 같은 토론주제를 내놓고 마주 앉은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특정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과 노동자가 화제가 됐다. 개별적 노동자가 그 시장에 얽매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 전에 다른 선택을 내릴 수는 없었을까. 상상의 그 노동자가 어려움에 직면한 까닭은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타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구조와 행위주체’는 사회와 개인 간의 문제로 단순화해도 학문적이지 않은 대화에선 통용된다. 여기엔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구조 우위론이 있다. 개인 행위는 대부분 구조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구조주의, 단순화한 마르크스주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인의 능력과 창발성에 초점을 맞춘 반대 입장이 있다. 개인 우위론으로, 보기에 따라 노오력을 이상화하는 보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세 번째 입장은 두 가지 입장을 조화한 것으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행위주체와 인간 행위에 관한 구조의 영향을 모두 인정하는 접근법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세 번째 관점에 서서 개인과 사회 중에 강조점을 다르게 두면서 종합의 틀을 남다르게 고안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직관적으로 현실이란 게 개인과 사회 중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니 말이다.


과연 그럴까. 사회과학이나 담론에선 세 번째 입장이 전적으로 옳지만 현실의 개인을 논한다면 첫 번째 입장만이 옳고 그름을 떠나 전적으로 유효하다. 사회과학의 개인은 삶의 구체적 개인이 아니라 학문 분석을 위한 개인의 추상이다. 추상으로서 개인은 행위주체로 사회와 상호작용하지만, 구체적인 개인은 그저 삶에 던져질 뿐이다. “자신의 열정과 욕망”이란 것을 믿는다고 해도 그게 자신에 속한 것인지 타자화한 삶의 구조에서 자신의 것으로 믿도록 주어진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어느 구체적 시공의 개인은 당연히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추구할 수 있지만, 그 열정과 욕망을 ‘자신’이 ‘정말’ 원한 것인지는 죽을 때까지 확인할 수 없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형벌을 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a être libre.)”고 말했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이 문장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무엇인가에 구속된 상태라는 인간의 이중성이 담겼다. 나아가 무엇인가에 구속된 혹은 형벌에 처해짐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는 뜻이다. 청소년기에 산상기도의 제목 “주 안에서의 참 자유”가 끝내 사르트르가 한 말과 같은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 자유와 내 욕망이 내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끝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자유와 내 욕망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게 결코 나쁜 해결책이 아니다. 답이 없는 이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내 자유와 내 욕망이 내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내 자유와 욕망을 내 것으로 향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열정과 욕망”이든 사회적 기준이든 무엇을 추종해도 그것은 자신의 삶이다. 적어도 자신의 삶이라고 믿어도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학교 때 나의 선생님이 본능적으로 말했듯 개인의 삶에선 그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 자유 외엔 다른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베르테르의 선택 또한 이 삶의 범주에 속한다. 선생님 질책대로 삶이 아니라 공부가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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