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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Jun 25. 2024

왜 내 인생에 햇볕과 바람이 없을 것으로 단정해야 하나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오 내 친구여! 천재라는 강은 왜 그리 드물게 흐르는 것일까. 그 강이 도도한 물결로 넘실거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뒤흔드는 일이 왜 이리 드물어진 것일까? 사랑하는 친구, 그것은 양안에 사는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미래의 위험을 사전에 막을 줄 아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자와 튤립 화단, 그리고 채소밭을 지키기 위해 실기하지 않고 제방과 수로를 만들기 때문이네.     
O meine Freunde! warum der Strom des Genies so selten ausbricht, so selten in hohen Fluten hereinbraust und eure staunende Seele erschüttert? — Liebe Freunde, da wohnen die gelassenen Herren auf beiden Seiten des Ufers, denen ihre Gartenhäuschen, Tulpenbeete und Krautfelder zugrunde gehen würden, die daher in Zeiten mit Dämmen und Ableiten der künftig drohenden Gefahr abzuwehren wissen.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어릴 때는 누구나 혹은 대부분, 한 번쯤 아니면 제법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이 천재라고,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천재든, 수재든, 어려서부터 뛰어난 사람이 있긴 하다. 어린 나이에 발현하는 천재성은 타고난 두뇌와 관련한다. 특출한 기억력이나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해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어린 날의 천재성이 평생 이어지는 사례는 드물다. 수학이나 바둑 같은 예외적인 분야를 빼고는 천재는 땀과 세월의 산물이다. 천재는 염부를 닮았다. 바람과 햇볕에 땀을 더해 천일염을 일구는 염부(鹽夫)처럼 천재는 자신의 머리 안의 염전에서 세월을 조탁한다. 특히 인문학 분야일수록, 더 현대에 가까울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나는 앞에서 남다른 사춘기를 보내느라 S대 진학에 실패하고 삼수로 Y대에 진학했다는 얘기를 했다. 입시와 관련해 20대 초반에 나를 좌절시킨 내 또래의 먼 친척이 떠오른다. 별명이 무려 ‘호박에 침주기’. S대 가는 게 호박에 침주기만큼 쉽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형제가 모두 공부를 잘 해서 형은 S대 의대를 갔고, 동생은 S대를 두 번 갔다. S대에 입학해 다니다가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시험 봐서 다음 해에 다른 과에 진학했다. 둘 중에 누가 ‘호박에 침주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사람 다일 수도 있고. 그중 한 명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내가 얼마나 놀았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는지를 장황하게 얘기했다. ‘호박에 침주기’ 앞에서 무너진 내 자존심을 지켜보려는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런다고 알리바이가 성립했을까.     

The Water Genius (1896) Henri Fantin Latour (French, 1836-1904)


기다림이 필요한 건 천일염만이 아니다     


‘호박에 침주기’들이 그 뒤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그저 의사가 됐을 것이고 다른 한 사람도 대충 무난한 삶을 살았을 터이다. ‘호박에 침주기’ 앞에 펼쳐진 인생이 그저 ‘호박에 침주기’였을 테니 ‘호박에 침주기’라는 게 오뉴월이 한철인 메뚜기 같아서 그때의 좌절과 열등감이 지나고 나니 부질없다. 원래 부질없었는데, 그때 몰랐을 뿐이다.


자주 교류하는 S대 출신 지인과 한국의 대학입시에 관해 개탄하며 대화하던 중 그가 이런 말을 한 한 적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S대에 다니면서 데모밖에 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 대학을 다닌 보람은 가끔 높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탁월한 친구를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했다. ‘호박에 침주기’ 유형이거나 앞서 언급한 소년 천재형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많이는 아니나 어느 정도 살아보니 내 견해로는 ‘호박에 침주기’나 소년 천재가 최종적으로 천재로 판명나는 일이 드물었다. 천재의 대부분은 ‘천일염’ 유형이었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겨서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면, 확실히 그런 천재는 염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인용문처럼 천재의 강이 드물게 흐르고 또 도도한 물결을 이루는 게 드문 것은, 천일염을 만들 듯 세월을 갈고 닦는 삶을 거쳐야 천재가 태어나는데, ‘호박에 침주기’보다 그런 인고를 감내한 염부를 찾기가 더없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문학 분야에선 더 큰 인고가 필요하다. 수천 년 축적된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윤곽이라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천일염’이 산출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10대에 좋은 시를 쓸 수 있지만 그 나이에 좋은 소설을 남기기는 더없이 어렵고, 철학책을 남기기는 불가능하다. 현대에 이르러 지식의 양이 방대해지면서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윤곽이라도 일별하려면 점점 더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천재의 세계가 공평해진 셈이다. 옛날에 머리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시간 싸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30~40년 꾸준히 공부하지 않고선 천일염을 만들지 못한다. 염부를 여맹이라고도 하는데 ‘여맹이가 눈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파질이라고 하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주변에서 나를 보고 지식인으로 혹은 인문학자로 ‘빅5’에 든다고 농담을 던지곤 하는데, 그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이 농담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어떤 검사들과 달리 나는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진지하게 “나머지 4명은 누구지?”하고 묻곤 한다. 어린 나이가 아니니, ‘호박에 침주기’ 앞에서 한 것 같은 치기나 열등감의 반영인 반응이 아니다. 특출한 두뇌라고 할 수는 없으나 머리가 좋은 편에는 속하고, 어쩌다 보니 이날까지 빡세게 대파를 미는 삶을 살았으니 ‘빅5’에 못 든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30년 이상을 열심히 오롯이 공부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드물다. 대학시절엔 학점이 좋지 않았지만, 운동권을 맴도느라 역사를 비롯해 사회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4수를 포기하고 1학년 2학기에 들어간 동아리가 운동권이었다. 그땐 운동권이 아닌 동아리를 찾는 게 힘들었기에 특별히 의식이 있어서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2학기에 소위 운동권 커리큘럼을 가지고 의식화 세미나라는 걸 하는데, 삼수생 출신이다 보니 2~3학년의 지도가 정확하게 반박하진 못하겠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1학년 겨울방학에 부산의 이모집에 처박혀 사촌동생 과외를 했다. 선금으로 과외비를 받아 당시 가장 뜨끈뜨끈한 운동권 서적 100권을 샀다. 방학 내내 잠깐 과외 하는 시간을 빼고 책만 읽었다. ‘선배’들에 기죽지 않겠다는 허영심은 2학년 개학과 함께 성공적으로 채워졌다.


신문사에 들어가선 입사동기들 말로 ‘꽃길’을 걸었다. 사회부나 정치부 같은 몸빵하는 부서가 아니라 경제부 국제부 문화부 등 공부하는 부서를 돌았다. 요즘 기레기라고 무시들 하는데, 전문적인 내용을 소화해 흔히 말하듯 중학교 3학년도 이해하게 기사를 쓰려면 적잖은 공부가 필요하다. 취재(또는 공부)를 그만두고 후배들 기사를 고쳐야 할 즈음엔 사내에서 연구소를 만들어 홀로 또 공부하며 지냈다. 연구소를 함께 한 교수들 덕에 그사이에 석사(경제학), 박사(경영학) 공부를 마쳤고, 또 귀가 얇은 탓에 신학 쪽으로 또 석사 박사 공부를 마쳤다. 틈틈이 50권 가까운 책을 썼고, 한 곳 정해진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에게 끊임없이 가르쳤다.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보니 책을 쓰고 가르치는 일이 가장 큰 공부가 됐다. 50살 무렵이 되자 무슨 책을 읽어도 대충 얼개를 짐작할 수 있었고 놀랄 만한 내용을 발견하는 일이 없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무릎을 친 책은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정도였지 싶다. 다른 사연이 있긴 했으나, 그래서 나이 들어 문학을 읽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에선 무릎 칠 일이 없지만 자주 눈물을 쏟는다.    

  


5’라서     


인생이 공부해야 하는 경로로만 풀렸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모두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지식인 그룹인 대학교수 중에서 기질 때문이든 여건 때문이든 외부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부라는 건 딜레탕트처럼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강제로 해야 제대로 한다. 어떤 트랙에 올려지면 억지로 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완주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자발적 공부처럼 힘든 일이 없다. ‘빅5’는 내가 원한 게 아니라, 내 팔자가 그렇게 풀렸을 뿐이다. 


‘빅5’라서 좋은가? 잘난 체할 수는 있다. 재수가 없게 보이지 거짓 행동은 아니다. 8~10급 바둑 가르치는 데 1급이면 되지 9단이 나설 필요가 있냐고 거드름 피울 수도 있다. 그게 다다.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택도없다. 100위권에도 끼지 못하는 자들이 대단한 지식인인 척 으스대고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으며 매스미디어에서 인기를 끄는 걸 보면 감정이 상하고 시샘하게 된다. 내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으로 아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천만에. 애초에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 왜 인기를 마다하겠는가. 나는 지식인이지 성인이 아니다.


세계인이 특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에 실패한 화가였다. 살았을 때 그의 그림 중 단 한 작품만 팔렸다는 얘기는 실패를 방증한다.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란 그림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기록이 남았다. 죽고 나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명성을 얻었지만, 살아서는 남루한 삶을 일관했다.


감히 고흐와 비교하려고 든다고? 그런 건 아니다. ‘빅5’라고 해야 당대에 한할 뿐이어서 여러 세대를 관통한 천재와 어떻게 비교할 엄두를 내겠는가. 고흐가 살아서 고흐였다면 부러워했겠지만, 죽어서 고흐가 된 실제 고흐는 부럽지 않다.


천일염은 염부가 대파질하며 흘리는 땀 외에 햇볕과 바람이 필요하다. 땀은 인간에 속한 것이지만, 햇볕과 바람은 인간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안이다. 비 오는 염전에서 대파질하는 염부를 상상해보라. 그런 염부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어쩌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대니까 애써 만든 천일염을 팔아야 할 텐데, 좋다고 팔리면 이 세상이 진즉에 천국이 됐을 것이다. 햇볕과 바람, 판매는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땀만 흘릴 수 있다.


내가 ‘빅5’라면 아마 땀의 ‘빅5’일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그렇게 결말을 지으면 더없이 훈훈했겠지만, 반대한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아직 그런 가식을 쌓지도 못했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얄팍한 제목의 책 제목이 있더라. 읽지 않았고 읽을 필요를 못 느낀다(베스트셀러 없는 다작 작가의 시샘?). 그 제목에 빗대, 왜 내 인생에 햇볕과 바람이 없을 것이라고 서둘러 단정해야 하는가. 그만큼 대파질을 열심히 해놓고 말이다. 다행히 고령화 시대여서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기다릴 시간이 충분하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대파질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스미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니 하던 일 하는 수밖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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