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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Jul 02. 2024

글쓰기의 '킬러아이템'은?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물론 그 일로 어머니의 마음이 상하셨겠지. 추밀고문관이나 공사를 목표를 한 아들의 자랑스러운 질주가 갑자기 멈춰서는 걸 보아야 했고, 게다가 작은 짐승 한 마리까지 매달고 마구간으로 되돌아왔으니 말이야!
Freilich muß es ihr wehe tun. Den schönen Lauf, den ihr Sohn gerade zum Geheimenrat und Gesandten ansetzte, so auf einmal Halte zu sehen, und rückwärts mit dem Tierchen in den Stall!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누구에게나 애창곡이란 것이 있다. 18번이라고도 한다. 애창곡이 여러 개면 번호가 늘어난다. 두 번째 애창곡이 17번인지, 19번인지 아직도 헷갈린다. 애청곡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애창곡과 애청곡이 일치한다. 나로 말하면 일치하지 않는다. 연말 같은 때, 정말 어쩌다 노래방에 가서 불러야 하는 노래는 거의 정해져 있다. 새로운 노래를 배워서 선보일 정도로 노래방 문화에 대한 애착은 없다. 애청곡은, 음악을 즐겨듣는 편이 아닌 데다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없다.     


어릴 때 배운 노래    

 

누구에게나 뭔가 마음이 애틋해지는 노래가 있다. 나랑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머릿결이 좋은 단발머리 50대 초반의 아저씨가 “들으면 눈물이 나는 노래가 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법하다. 그런 노래는 집단적인 기억이 개입했거나, 개인사와 관련한 두 종류일 수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은 운동권 노래를 못 불렀다. 학창시절 대단한 운동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단한 운동권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남들처럼 투철하게 그 시절을 살아내지 못한 면구함과 적당히 세상에 투항한 듯한 죄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원래 그런 법이다. 그 시기에 죽기 살기로 제대로 한 사람은, 운동이든 사랑이든 지나고 미련이 덜한 법이다. 나 같은 얼치기 운동권 출신이 죄의식 운운하는 법이다. 참, 생각해보니 그땐 죽기 살기로 하다가 실제로 죽기도 했다. 그런 공포가 겁 많은 나에게 압도적으로 작용해 운동권의 변두리를 맴돌 게 만들었지 싶다.


개인적으로 애틋한 노래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다. 김상희란 가수가 1967년에 발표했다. 어머니가 좋아한 노래이다. 어머니는 단연 이미자 노래를 가장 좋아했는데, 내 기억엔 유독 이 노래가 남아있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방법의 하나로 어머니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려서 노래를 잘했고 꿈이 가수였다고 한다. 나와 내 형제의 어머니, 내 아버지의 아내 노릇을 하느라 꿈 근처에 가본 적이 없다. 김상희의 이 노래를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쳤는지, 아니면 흥얼거리는 걸 옆에서 듣다가 알아서 배웠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가장 먼저 부른 노래는 동요가 아니라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었다. 


‘장수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라디오에서 하다가 TV로 넘어간 프로이다. 어머니 옆에 누워서 어린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며 “나중에 ‘장수만세’에 나가서 같이 부르자”고 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도 그랬던 것 같은가 하면 들어서 기억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가사를 다 외운다. 하지만 실제로 부르기는 어렵다. 콧등이 시큰해져 끝까지 부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킬러 아이템     


글쓰기를 강의할 때 중요한 순간에 써먹을 ‘킬러아이템’을 몇 개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어머니’이다. 논제가 무엇이든 작문을 할 때 어머니와 관련한 추억을 적당하게 버무려 넣으면 공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글쓰기 전략이다.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감성의 소구점이 된다. 어머니가 부재한 사람에겐 그 결핍이 더 강력한 소구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아버지’는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성공확률이 훨씬 높고, 가끔 ‘아버지’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어머니’의 강점과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차이는, 가부장제라는 사회 특성과 인류가 포유류라는 종 특성이 함께 작용해 생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머니가 언젠가 자신의 육아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아이가 젖을 열심히 빨다가 작은 손을 젖무덤 언저리에 턱 하고 올려놓을 때 느끼는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 아이 중 하나가 나이다. ‘대단’은 임의로 쓴 말이고 어머니가 다른 단어를 썼는데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하지도 않다. 독자가 쉽게 받아들이듯 그저 최상급의 좋은 감정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멋지게 이런 말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모두 그런 최상급의 감정과 애착으로 세상에 초대된 존재이니 자긍심을 느껴도 좋겠다.      


최상급의 감정과 애착     


그러한 최상급의 감정과 애착의 장면이 아이의 뇌리에 박혀 평생 가는 기억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면 개인의 삶이 얼마나 견고해졌고 또 세상은 얼마나 풍요로워졌을까. 신의 섭리인지 인간에겐 그런 기억력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체재가 있기는 하다. 자신의 기억은 없지만, 자신의 자녀를 대한 기억은 남는다. 어머니도 내가 당신의 젖가슴에 손을 얹은 모습을 아직 기억하지만 자신이 외할머니 가슴에 안겨있던 모습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안타깝게 이 최상급의 감정과 애착은 부모가 자식에게 전하지 못한다. 이 ‘최상급’은 사실 아이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고 평생을 바쳐 자식에게 헌신하는 셈이니 선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체재라기보다 시차가 큰 보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부모에게 선물을 주었으니, 자신도 부모가 되어 선물을 받게 된다. 사회가 변했고, 육아비용이 천정부지여서 요즘은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선뜻 출산을 결심하지 못한다. 


보상은 주로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아들이 갓난아이였을 때 수유한 경험이 있다. 퇴근 후에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고 잠을 재운 기억이,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말한 것과 같은 ‘최상급’은 아니었다. 포유류란 규정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서 비롯했으니 여성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게 타당한 논리이다. 인간 남성은 가부장제에서 다른 방식의 보상을 받으니 너무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모성의 세속성     


‘최상급’의 초기 애착은 자녀의 성장과 함께 기대로 바뀐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일 텐데 대체로 그 기대가 인용문에서 보듯 세속적인 성공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같은 어머니는 드물다. 


보통의 어머니는 평범한 세속적 기대와 그 기대의 좌절 속에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다가 늙어버린 어느 날 기대라는 것이 충족되든 안 되든 큰 의미가 없으며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현세의 인연만이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보통의 자식은, 자신을 향한 기대를 종종 족쇄로 받아들이며 한편으로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 족쇄에서 풀려나고 싶은 두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대체로 자신이 부모가 되며 자신에게 쏟아진 기대를 대물림함으로써 면책한다.


아버지까지 포함한 부모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식에 거는 기대라는 것이 물론 성취되기를 바라지만, 기대의 본질은 기대 자체이다. 자식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 부모만큼 자식을 맥빠지게 하는 부모가 있을까. 기대하고 지켜보는 게, 어려서 젖 먹이는 것과 동일하게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다만 연습하고 부모가 되는 사람이 없기에 어떻게 기대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몰라서 서투르게 기대할 뿐이다. 젖 먹이기와 기대하기는 난도가 현저히 다르다.


소설의 베르테르는 가장 큰 불효를 저질렀다. 추밀고문관이나 공사가 되지 않았어도 부모가 베르테르를 자랑스러워했을 길은 많았을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사회에서 자랑스러운 무엇이 되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젖무덤에 고개를 파묻던 그 모습과 그 인연 자체로 자랑스럽다. 같이 어른이 된다면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향기로운 가을 길을 함께 걸으며 가깝게 이 세상을 함께 살아준 것만으로 감사하게 되는 존재이다.


‘장수만세’에 나가자는 약속을, 나가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을 함께 부르자는 약속을 못 지켰다. 어머니는 내가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했을까.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테지만, 내가 매달려 젖을 먹던 꼿꼿한 그의 척추가 이제 할미꽃처럼 꼬부라져 더는 자태가 코스모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먹일 젖도, 쏟아부을 기대도 없이 어머니는 나와 같이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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