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유서 쓰기 혹은 라면물 올리기 06화

라이킷 14 댓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안치용 May 07. 2024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족속을 이해할 수가 없다. (...) 그런 인간을 상대하는 건 고통스러워.

Sieh, ich kann das Menschengeschlecht nicht begreifen, das so wenig Sinn hat, um sich so platt zu prostituieren.(...) Das ist ein Leiden, mit so einem Menschen zu tun zu haben.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치부를 드러내다”로 번역한 독일어 ‘prostituieren’은 영어 ‘prostitute’에 해당하는 말이다.

‘prostitute’은 매춘부란 명사와 매춘하다는 동사의 뜻을 동시에 갖는다. 치부(恥部)가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아니한 부끄러운 부분”과 음부란 뜻을 겸하니 적절한 번역인 셈이다.

음부를 부끄러운 신체 부위로 인식하는 태도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음부를 드러내고 다니는 행태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치부는 아니지만, 문명사회의 도래와 함께 내려진 사적 기관이란 규정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다고 타협했다. 타협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고결하게 정신변동에서 홀로 존엄과 자유를 외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자유와 관련해서는 그것 말고 다른 시급한 일이 훨씬 많다.

어린 날의 부끄러운 기억

까칠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성격이긴 하나, 남에게 해코지하며 살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해코지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의도적으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착해서가 아니라 새가슴이라서 그렇지 싶다. 남들도 그렇지 않을까.

물론 살면서 부끄러운 순간이 왜 없으며, 이불킥을 하며 후회한 실수, 낯 뜨거운 비겁함이 왜 없었겠는가. 그것도 남들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일이 물어보지 않았으니 어쩌면 내 실수, 내 비겁, 내 창피가 더 클지 모르겠으나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아직 무던하게 삶의 걷고 있으니 비슷한 수준이라고 단정하련다.

부끄러운 기억으로, 스스로에게는 귀엽기도 한 기억으로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의 남산 독서교실이 떠오른다. 서울 시내 중학생을 학교당 두세 명 모아서 남산도서관에서 진행한 독서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중학교의 태반이 요즘 같은 남녀공학이 아니었기에 남산도서관 독서교실은 또래 이성과 접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도 했다. 정작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엔 서로 내외하였고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남학생들은 점심 먹고 주로 잔디밭에서 동그랗게 모여 배구놀이를 했는데 끼어드는 여학생이 없었다. 남학생은 더더욱 여학생 무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독후감 발표 시간. 학교별로 발표하는 행사였고, 여러 발표가 끝나고 순서가 되었는지 사서 선생이 내가 재학 중인 학교를 불렀다. 독후감을 발표해야 한다는 걸 사전에 몰랐는지, 게을러서 그랬는지, 난 미리 독후감을 써두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 참가한 다른 학생 또한 그랬는지 눈을 내리깔고 모른 척했다. 우리 학교에서 발표할 사람이 없느냐고 묻고 다른 학교로 넘어가려는 참에 손을 들었다. 다른 친구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 끝내 내 시선을 외면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소감을 되는대로 얘기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으나, 안중근과 테러리스트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구원의 정치적 의미 비스름한 걸 얘기한 듯하다. 즉흥 연설에 가까웠으니 준비한 글을 읽는 형식에 비해 얼마나 산만하고 엉성했을지 짐작이 가지만 천만다행으로 발표한 내용이 휘발해서 지금의 민망함이 덜하다.

민망한 혹은 부끄러운 순간은 독후감 발표 시간이 모두 끝난 다음에 있었다.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조사했는데, 설문으로 하지 않고 읽은 책의 권수에 해당하는 숫자마다 공개적으로 손을 들게 했다. 최저 권수는 아니었던 것 같으나 읽은 책이 상당히 적은 축에 속했다. 나름 무난하게 책을 읽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더 집중해서 더 시간을 많이 사용해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 게다가 그들은 발표를 나처럼 부잡하게 하지 않았다. 사서 선생이 헤아리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짧은 시간에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렸는지, 지금도 그 화끈거림이 생생하다.

전체 독서 프로그램이 끝나고 귀가한 다음에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작은 사건이 있었다. 모두 헤어지며 대충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남산도서관을 나설 때 동갑내기 여학생이 나에게 껌을 주었다. 한 통도 아닌 그저 껌 하나. 껌을 나눠주는 정도니까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집에서 껌을 씹으려고 껍질을 벗기니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물망초 나를 잊지 마세요”

정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중학교 때 남산의 일화는 ‘고백’을 받고 끝났으니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분류해도 좋겠다. 그 아이의 바람대로 나는 그를 아직 기억한다. 이름은 오래전에 잊었다. 얼굴은 당시에도 뚜렷하지 않았다. 이 일화엔 영화의 쿠키 영상에서 보여줄 법한 반전이 따라붙는다.

대학에 진학하고 참여한 연합동아리에서, 같이 집행부를 한 것으로 기억하는 근처의 어느 여대 철학과 학생이 남산의 인연을 되살려냈다. 일종의 안부라고 봐야 하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내가 그를 쫓아다닌 것으로 나를 기억한다는 물망초 소녀의 회상을 전했다. 나랑 연합동아리를 함께 한 그와 ‘물망초’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녔고, 알 수 없는 경로로 나를 화제에 올려 물망초가 나와 인연을 설명한 것이다.

물망초와 나의 기억 중에서 당연히 나는 내 기억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사왜곡도 아니고 사실을 바로잡을 마음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크게 불쾌하지도 않았다. 웃어넘길 수 있었다. 물망초와 나는 그 간접적 접촉 외에 이날까지 재회하지 않았다. 만일 물망초를 만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중학교 2학년 때의 검은 세라복을 입은 소녀 물망초를 만나보고 싶다. 껌을 줄 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땐 쑥스러워 아무 말 못 하고 웬 껌인가 하며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여행이 가능해져도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물망초나 그의 껌이 시간여행의 우선순위에 들 만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나지 않지만 잊지는 않은, 미소 정도를 수반하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불쾌한 기억도 있다. 어느 단체활동에서 겪은 사건은 불쾌라는 감정을 넘어선다. 나의 까칠함에 불만을 품은, 일을 잘하고 싶고 자기 낯을 세우고 싶은 아무개가 내가 아닌 나와 친한 누군가에게 술김에 나와 관련하여 폭언을 퍼부은 사건이다. 나를 공격하고 싶었는데 직접적인 피해는 나의 지인이 보았다.

놀랍게도 아무개는 폭언에 대해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할뿐더러 나의 지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개와 친밀한 사이로 단체에서 나름 발언권이 있는 다른 아무개는 아무개를 비호하기 위해 있지 않을 일을 있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 모두 평생 대의를 부르짖으며 운동권에 몸을 담은 사람이었다.

이후 정치권이나 깡패영화에서 볼 법한 스토리가 펼쳐졌다. 관점에 따라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 것을 안 했다고 하고, 보지 못한 것을 봤다고 하는 행태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메시지가 불리하니 메신저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까지 사회 저편에서 사용하는 기술이 똑같이 동원됐다. 여담이지만 다만 그들은 나의 지인이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한 시간이나 폭언과 부적절한 발언이 이어진다면 요즘 같은 IT 세상에 기록을 남겨두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아무개가 나나 나의 지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사건 이후에 마주한 그의 얼굴에서 본 것은 적개심을 앞세운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추한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인을 설득해 함께 그 단체를 나왔다. 벌금형이 내려질 정도이겠지만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고, 전체 모임에서 그들의 거짓말과 비호를 까발려서 혼내주지 않았다. 내가 지인을 말렸으니 내가 아무개와 다른 아무개를 보호한 셈이다.

까칠한 것으로 알려진 나는 왜 이렇게 무른 것일까. 최근에 내가 주관하는 독서모임의 회원 한 분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란 책을 읽어 보았냐고 물어보았다. 개인적으로 멀쩡한데 집단적으론 망가지는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취지였다.

내가 체험한 사례는 비도덕적 인간이 도덕적 사회를 주장한 것으로, 흔히 거론되는 위선적이고 혐오스러운 행태이지만 가까이서 직접 체험하긴 처음이다. 나는 왜 싸움을 피했을까. 다른 아무개가 아무개를 감싸기 위해, 증거가 있어도 못 이길 수 있으며 아무개가 아는 대단한 변호사가 많다는 같잖을뿐더러 정의롭지 못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왜 응징하지 않았을까.

표정 때문이었다. 아무개가 그때 나에게 들이민 표정은, 사건의 경중과 무관하게 타락한 인간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할 때 취하는 표정의 전형이란 생각이 들었다. 치부는 인간의 허리 아래 특정한 기관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일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때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으니 그리 험하게 살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인의 싸움을 말리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있는 단체의 지분을 포기하고 함께 떠나기로 한 것은 그 치부를 상대하느라, 내 얼굴에도 그게 떠오를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 인간을 상대하는 게 고통스러운” 까닭은 그 인간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인간을 상대하며 나 또한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그 싸움에 사활적 이해가 걸렸다면 그래도 온갖 번잡을 감내하며 싸워야 하겠지만, 나에겐 그런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망초가 한 것과 같은 추하지 않은 거짓말은 삶의 예쁜 풍경으로 남겠지만, 불쾌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치부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며 앞으로는 까칠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지만, 당장은 까칠한 데 그치며 치부를 얼굴에까지 확장하지 않는 데에 감사해야 할 듯싶다. 너무 수세적인 인생관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