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모든 오빠들에게 #1
사랑에 빠지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모든 방법 속에는 사랑에 빠진, 혹은 사랑을 자각하게 된 어떤 순간이 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니 샴푸 향이 느껴졌든, 팝콘 너머로 스친 손가락이 짜릿했든, 슬쩍 머리를 묶어 올리는 상대의 목선이 아름다웠든, 순간 상대가 자신의 심장 깊은 곳을 푹 하고 찔리는 것 같았던 순간이 존재한다. 물론 상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력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의, 그러니까 입덕('들 입'자에 팬을 뜻하는 '덕후'의 합성어다. 이것까지 설명하기에는 독자층이 입덕을 최소 1번 이상 경험한 사람일 것 같지만...)의 기억은 무척 강렬하다. 피할 수도 없이 당하니 '덕통사고'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교통사고에 비교하는 건 너무 폭력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 입덕은 당신이 마음 다해 사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입덕이 처음이라면 당신은 상황을 부정할 수도 있고, 혹은 나처럼 입덕 경험자라면 냉큼 메말랐던 나의 맘에 들어온 새로운 오빠를 위해 트위터 계정을 하나 만들지 모른다. 경험 상, 입덕 부정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나 그 정도로 얘네 좋아하지는 않아~"하며 곁눈질로 슬쩍슬쩍 올라온 사진을 보는 동안, 그들은 수많은 자료를 만들어내며 그들 나름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과 굿즈는 돌아오지 않는다. 타임 이즈 골드다.
지금 사랑하는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생생한 기억이라서 가장 최근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때는 2020년이다.
2020년. 이 해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어떤 사건이 있었고, 원래 좋아하던 사람들을 계속 여전한 마음으로 좋아하기에는 나의 밴댕이 소갈딱지만한 마음이 도저히 넓어지지가 않았다. 그날은 사회인의 의지로 간신히 회사에서 울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음은 방금 해체 폭탄을 터트린 건물처럼 와르르 무너진 채로 집에 돌아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어느 편에 할 예정이므로 깡생수 혹은 알콜 음료를 나이에 각자의 맞추어 준비 부탁드린다.)
물론 여전히 그 그룹의 팬으로 남아있었지만 예전 같은 흥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뭘 봐도 크게 설레지 않았고, 나는 다른 자극을 찾아 헤매었다. 그저 웃기고 잘생긴 사람들, 다른 아이돌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누구를 좋아해 볼까 같은 야심 찬 마음은 아니었고, "무슨무슨 아이돌 웃음 참기 모음집" 같이 웃긴 자료들 유튜브에서 검색했다. 여기저기 많이 떠돌던 세월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무섭도록 정확하다. 그는 내가 모르는 나의 취향을 파악해서 나에게 세븐틴의 자체 컨텐츠 '고잉 세븐틴'을 추천했다. 2020년 9월, '배드 클루' 특집 상편이었다. 짧게 줄이자면 이건 일종의 추리 상황극이다. 멤버 각각에게는 특이한 역할이 주어진다. 43세 부회장, 29세 혼외자, 48세 비리 검사 같은 역할들이 주어지고, 멤버들은 그 회 안에서 살인사건의 범인과 배후, 이유 등을 추리해내야 한다.
영상 초반, 한 명 씩 들어오며 자기소개를 이어갈 때였다. 안경을 쓴 한 멤버가 쓰리피스 수트에 넥타이핀을 꼽은 채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들어왔다. 어디로? 내 마음속으로.
“43세 박 가 주치의 전원우"란다. 세븐틴에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다. 노래는 몇 번 들어봤었지만 아이돌로써는 관심이 없었다. 대충 멤버가 많다는 것, 부승관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문명특급에 한 번 나왔다는 정도?
그래서 정말 혼란스러웠다. 저 사람이 진짜 43살인가..? 누구지..? 이름이 진짜 전원우는 맞는 건가?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에 이어질 콘텐츠의 하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사이 유튜브는 나에게 끊임없이 세븐틴을 추천했고, 나는 구글에 급기야 세븐틴을 검색한다. "세븐틴 나무위키"
"사랑에 빠진 순간 하는 일은?"이라는 질문에 "나무위키 정독하기"라는 대답을 한 어떤 트위터의 덕후가 있었다. 그 사람이 어느 동네의 누구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공감의 의미로 리트윗을 눌렀다. 역시, 사랑에 빠지면 나무위키지.
시작 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나무위키는 사이트 소개글에서부터 해당 사이트가 검증되지 않았으며, 편향적인 내용이 있을 수 있다고 시작하면서도 백과사전을 표방한다. 항상 검증된 내용만 있어야 하며 사실만 있어야하는 사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작이다. 그리고 누구나 편집할 수 있다. 따라서 허위사실이 많고, 아주 많은 문서들에서 여성혐오와 거짓 정보 유포에 서슴치 않고 있다.
이건 아이돌 문서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니 아이돌 나무위키 문서를 읽을 때에도 항상 주의하면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렇게 가득, 아이돌에 대한 정보를 한 곳에 하나의 양식으로 쌓아둔 곳은 없으니... 역시 사랑에 빠졌을 땐 나는 큰 저항 없이 나무위키로 잡혀가는 편이다.
최소한 아이돌 판에 한정 지어 말하자면 여긴 사랑으로 지어진 조선왕조실록이다. 왕이 기록하지 말거라 하는 것까지 적었다는 신하들만큼 충직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그들보다 훨씬 큰 사랑을 담아 상대에 대해 서술한다. 그 아이돌이 스치듯 말한 취향, 스치듯 말한 과거사들도 이곳에 거의 정리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깊이 들어갈수록 새로운 정보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제 막 입덕하여 "서로 알아가는 사이"가 되는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한 정보다. (게다가 요즘은 아이돌등판이라는 유튜브 콘텐츠에 아이돌이 나오면 직접 정보를 읽어주며 틀린 정보를 정정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나무위키의 묘미는 문서에 빼곡히 들어찬 하이퍼링크다. 초록색 밑줄에 링크 표시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이 문서 파도타기는 싸이월드 일촌 파도타기보다 깊고 넓다. 심지어 어떤 발언이 어디서 나온 건지 유튜브 링크가 들어있거나 인터뷰 기사 링크가 되어있는 때도 있다. 다 읽기가 쉽지 않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에게 있는 건 시간뿐이다. 그렇게 파도를 타고 무대와 인터뷰와 짤들을 넘나들다보면 그는 내 마음에 살포시 안착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뒤처지지 않는 덕질을 위해서는 빠른 정보 습득력이 필수다. 첫 번째는 트위터다. 이미 엑소를 통해 트위터라는 정보의 바다를 맛보고 있었던 나는 빠르게 세븐틴의 정보만을 팔로우하기 위한 트위터 계정을 팠다. 입덕 부정기는 짧을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일단 계정부터 만들었다. 조심스럽게 트윗을 올린다.
#트친소
이제 막 계정 팠어요..^^ 세븐틴 좋아하는 아기(얼마 안 되었다는 뜻, 나는 물론 성인이다) 캐럿(세븐틴 팬덤 이름)입니다! 세븐틴 얘기 많이 나눠요 ☺️ (최대한 선량해 보이는 스마일 표시) 트윗에 흔적 남겨 주시면 모시러(원래 극존칭을 쓴다) 찾아갈게요!
이렇게 '트위터 친구'들을 만든다. 그 친구들은 기깔나는 세븐틴의 정보들을 나의 트위터 계정에 물어다 준다. 멋진 친구 파랑새들이 세븐틴 소식을 물어다 주면 나는 감탄하고 눈물 흘리며 또 한 마리의 파랑새가 되어 세븐틴의 정보들을 열심히 퍼다 나른다. 치르르르 치르르르 나는 24시간 내내 지저귀는 파랑새여요~ 잠자는 시간 말고는 쉬지도 않고 트위터에 글을 써요~
트위터를 만들었다면 반 이상 준비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다음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글로벌 소셜 미디어에서 해당 아티스트의 공식 계정을 팔로우하면 된다. 알림 설정은 선택이지만 해놓는 것이 좋다. 12시에 갑작스럽게 티저가 올라오면 하던 일 모두 멈추고 달려가야 한다.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이제, 내가 흘려보낸 그들의 빛나는 과거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아름다운 현재를 쫓아 하나하나 즐기며 사랑하면 된다. 장담컨대 그 여정은 무척 즐겁고 행복하고 짜릿할 것이다. 내일과 내년의 우리 마음 그리고 오빠들의 마음은 장담할 수 없으니 사랑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