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관을 쓰지 않는 왕
금요일 오후의 악몽
"이거 내일까지 다시 해와."
금요일 오후 5시 30분. 퇴근을 준비하던 김 대리에게 떨어진 팀장의 한 마디였다. 일주일 동안 밤새워 만든 기획안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김 대리는 기계적으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의문이 들끓었다. '뭐가 문제지? 어떤 부분을 바꾸라는 거지? 왜 다시 해야 하지?' 하지만 그 질문들은 목구멍 아래로 삼켜졌다. 한국의 직장에서 상사의 지시에 "왜요?"라고 묻는 것은 여전히 금기였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김 대리는 추측만으로 기획안을 뜯어고쳤다. '혹시 이 부분이 문제일까?', '저 부분을 이렇게 바꾸면 될까?' 명확한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수정했다.
월요일 아침, 다시 제출한 기획안을 본 팀장의 반응은 더욱 차가웠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네."
김 대리는 허탈했다. 만약 금요일에 "어떤 방향으로 수정하면 될까요?"라고 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수많은 직장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군대식 리더십의 잔재
"까라면 까." 한국 조직문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것일 것이다. 군대식 명령 체계가 기업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문화가 효과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 빠른 실행력이 필요했던 제조업 중심 시대에는 "시키는 대로 빨리"가 경쟁력이었다. 복잡한 설명보다는 신속한 실행이 중요했고,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정확히 따르는 것이 성과를 좌우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21세기는 창의성과 혁신의 시대다. 단순 실행이 아닌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하고, 지시 이행이 아닌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리더들이 20세기 방식으로 21세기 조직을 이끌려 한다. 설명할 시간에 실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부하직원들이 자세한 배경을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한 글로벌 컨설팅 회사의 한국 지사 연구 결과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직장인의 82%가 "상사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다"고 응답했고, 67%가 "지시의 배경을 모른 채 일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 결과 재작업 비율이 선진국 평균보다 40%나 높았다.
실리콘밸리의 "5 Whys" 문화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 회의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 기능을 다음 버전에 추가합시다."
"왜 이 기능이 필요하죠?" (1st Why)
"사용자들이 요청했어요."
"왜 사용자들이 이걸 원할까요?" (2nd Why)
"현재 프로세스가 복잡해서요."
"왜 복잡하죠?" (3rd Why)
"단계가 너무 많아서..."
"왜 단계가 많죠?" (4th Why)
"초기 설계 때 예상하지 못한 케이스들 때문에..."
"왜 예상하지 못했죠?" (5th Why)
이것이 도요타에서 시작해 실리콘밸리로 퍼진 '5 Whys' 기법이다. 다섯 번의 "왜?"를 통해 문제의 본질에 도달한다. 표면적인 증상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왜?"가 도전이나 반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탐구 과정이다. 질문을 받는 사람도 공격받는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함께 고민하는 동료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장려하는 것이 21세기 리더십의 핵심이다.
쿠팡 김범석 대표의 "질문하는 리더십"
쿠팡의 급성장 비결 중 하나는 김범석 대표의 독특한 리더십 스타일에 있다. 그는 지시하는 대신 질문한다.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객 입장에서는 어떨까?"
"왜 꼭 이렇게 해야 하지?"
한 쿠팡 임원의 증언이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보고하러 갔는데 오히려 질문만 받고 오는 거예요. 답을 주기는커녕 더 많은 질문을 던지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질문들에 답하다 보면 스스로 더 나은 답을 찾게 되더라고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처음 계획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쿠팡의 대표 서비스인 '로켓배송'도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배송은 며칠씩 걸려야 하지?", "왜 새벽 배송은 안 되지?", "왜 모든 상품을 하나로 묶어서 보낼 수 없지?" 기존 물류업계의 당연한 관행들에 "왜?"를 던진 결과, 한국 이커머스의 판도가 바뀌었다.
김범석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리더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왜"를 묻는 것이 왜 어려운가
그렇다면 한국 조직에서 "왜?"가 특히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1. 문화적 장벽: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
유교 문화권에서 윗사람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례로 여겨진다. "왜요?"는 종종 "믿지 못하겠다"거나 "당신이 틀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나이와 경력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2. 과거의 트라우마: 질문하면 찍히는 문화
"쓸데없는 질문하지 마", "시키는 대로나 해", "말대꾸하지 마"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세대가 리더가 되어서도 같은 문화를 재생산한다. 어린 시절부터 질문을 억압받은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도 질문하기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3. 효율성의 함정: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착각
"설명할 시간에 그냥 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 없는 실행은 결국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앞서 김 대리 사례처럼 방향을 잘못 잡아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4. 리더의 불안: 모든 걸 알아야 한다는 부담
"내가 다 알아야 리더"라는 구시대적 사고가 문제다.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능해 보일까 봐 두려워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권위로 밀어붙이려 한다.
토스의 "컨텍스트 리더십"
핀테크 기업 토스는 이런 문제를 '컨텍스트 리더십'으로 해결했다. 모든 지시에는 반드시 세 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What: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y: 왜 이것이 필요한가
How: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면 좋은가 (강제가 아닌 제안)
실제 사례를 보면,
"결제 화면 UI를 개선해주세요(What). 최근 이탈률이 15% 증가했는데, 사용성 테스트 결과 버튼 위치가 혼란스럽다는 피드백이 많았어요(Why). 더 직관적인 플로우를 만들되, 기존 사용자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점진적으로 바꾸면 좋겠어요(How)."
이렇게 하면 실무자는 일의 목적을 이해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해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일에 대한 오너십과 동기부여도 높아진다.
토스의 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 회사에서는 '이거 고쳐'라는 한 마디만 들었어요. 뭘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니까 계속 물어봐야 했죠. 토스에서는 처음부터 전체 그림을 알려주니까 훨씬 효율적이에요. 그리고 제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도 있고요."
질문형 리더십 전환 가이드
그렇다면 어떻게 "까라면 까" 문화를 "왜라고 물어봐" 문화로 바꿀 수 있을까?
1단계: 리더부터 시작하기
변화는 항상 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네요"라고 적극적으로 칭찬하기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같이 생각해볼까?"라고 솔직하게 말하기
회의를 시작할 때 "질문 없는 회의는 실패한 회의입니다"라고 선언하기
2단계: 안전한 환경 만들기
질문해도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바보 같은 질문 대회" 개최해서 분위기 부드럽게 만들기
익명 질문함 운영해서 부담 없이 의견 제시할 수 있게 하기
질문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보상하기
3단계: 시스템으로 정착시키기
문화가 되려면 시스템에 녹아들어야 한다.
모든 지시에 "Why" 항목 추가를 의무화하기
프로젝트 시작 전 "5 Whys" 세션 진행하기
질문 지표를 성과 평가에 반영하기
A사의 섣부른 도입
하지만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 제조업체 A사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무작정 도입했다가 실패했다.
"오늘부터 모든 지시에 질문하세요!"
CEO가 선언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조직에서는 혼란만 가중되었다. 중간관리자들은 "내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직원들은 "이제 말 안 들어도 되는구나"로 오해했다. 결국 3개월 만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교훈은 명확하다. 문화 변화는 점진적이어야 한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형 질문 문화 만들기
서구의 직접적인 "Why?"가 부담스럽다면, 한국적으로 부드럽게 바꿔볼 수 있다.
직접적 질문 → 간접적 질문
"왜요?" → "혹시 배경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해가 안 돼요" → "제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다른 방법은?" → "이런 방법도 고려해보면 어떨까요?"
네이버의 '러닝 포인트' 문화
네이버는 한국적 정서를 고려한 질문 문화를 만들었다. 회의 끝에 "오늘의 러닝 포인트는?"이라는 질문을 의무화했다. "더 궁금한 점은?"으로 부드럽게 유도하고, 질문을 '학습'으로 프레이밍해서 부담을 감소시켰다.
세대별 접근법의 차이
질문 문화도 세대별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MZ세대 (20-30대)
이미 "왜?"에 익숙한 세대다. 오히려 충분한 설명이 없으면 동기부여가 저하된다. 목적과 의미를 중시한다.
접근법: "네 생각은 어때?", "더 좋은 방법 있으면 제안해줘"
X세대 (40-50대)
"까라면 까" 문화에서 성장했지만, 변화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체면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한다.
접근법: "경험에서 나온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시면 공유해주세요"
베이비부머 (60대 이상)
권위적 리더십이 몸에 밴 세대다. 하지만 후배들과의 소통에 대한 갈증이 존재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접근법: "선배님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 사례
마이크로소프트 코리아는 본사의 "Growth Mindset" 문화를 한국적으로 변형했다.
원래 방식: "Challenge everything"
한국 방식: "함께 고민하고 발전하기"
구체적 실천법:
"도전"보다는 "제안"이라는 단어 사용하기
1:1 미팅에서 먼저 질문 연습하기
팀 미팅에서 점진적으로 확대하기
결과는 놀라웠다. 직원 만족도가 32% 상승했고, 혁신 아이디어 제안이 3배 증가했으며, 이직률은 40% 감소했다.
변화의 지표: 질문이 늘어나는 조직
한 IT 기업의 변화 과정을 보면 질문 문화가 정착되는 단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1개월 차: 어색한 침묵
팀장: "질문 있으면 편하게 해"
팀원: (침묵)
3개월 차: 조심스러운 시작
팀원: "혹시... 이건 왜 이렇게 하나요?"
팀장: "아, 그건 말이야..." (설명)
6개월 차: 활발한 토론
팀원: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요"
팀장: "오, 그거 좋은데? 한번 해보자"
1년 차: 문화로 정착
신입사원: "여기는 질문해도 되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모두: (웃음) "질문 안 하면 더 이상해"
질문이 만드는 미래
"까라면 까"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왜라고 물어봐"의 시대다.
질문하는 조직은 실수를 줄인다. 목적을 알면 방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혁신한다. 관행에 도전하면 새로운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한다. 이해하면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멍청한 질문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 스마트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앞으로 지시를 받을 때, 용기를 내어 물어볼까.
"팀장님, 혹시 왜 이게 필요한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