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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12. 2024

10년, 짊어지고 온 출입증의 기억

"선배 저희 출입증 좀 바꿔주실 수 있으실까요? 비지터(방문객)라고 쓰여있는데, 민망합니다. 취재하러 가도 이게 보이면 신뢰를 안 하더라고요."


그의 말에 나는 조금 통쾌했다. 나 역시 가지고 있던 생각이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공감하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계약직과 프리랜서라는 건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퇴근하고 다시 문을 빠져나갈 때마다 자각하는 일이었으니. 동시에 만나는 사람마다 시선을 보내오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감추고 싶은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싶을 사람은 없을 테니.


선배는 가만히 듣고 있다 코웃음을 친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취재나 잘하세요.

내심 기대했던 우리 모두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앉아있었지만, 사실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 얼굴 없는 대상에 대한 질투 그리고 분노 그리고 서러움 때문에.


다 합해 14명 정도 됐던 것 같다. 작가는 프리랜서이다 보니 무기계약이나 마찬가지였고, 애들도 야무지게 일을 잘했다. VJ는 안타깝게도 2년 계약직이었고, 가까워질 만하면 사라졌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텔방에서 잠도 자보고 기약 없는 뻗치기도 하며 끈끈하게 지냈던 우리들은 어느새 하나둘 그만두고 제갈길을 가느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단 세 명만이 남아있다. 직종을 바꿔 다시 취직한 둘과 나.


야무지고 영리한 친구들은 진작에 그만둔 것이다, 그러니까. 부조리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에 더는 못 버티겠다 나갈 수 있는 건 용기였고 능력이었다. 나는 그러질 못했다. 운이 좋은 편이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코너를 우연히 맡게 되었고, 부서 이동이 있을 때마다 늘 원하는 자리에 갔다. 무엇보다 원하는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크고 작은 일을 겪어낼 때마다 항상 내 의견을 존중해 주는 선배와 동료들이 있었다. 나는 조금 덜 영리하고, 덜 야무졌다. 오래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작은 플라스틱 카드는 잊을만하면 내 자존심을 구겨댔다. 출입증을 소재로 쓴 일기가 몇 장이던가. 회사에서 나눠주는 추리닝이며 후드집업이며 알록달록한 담요며. 온갖 것들을 다 누리고 살아도 그 얄궂은 출입증은 나를 끊임없이 주시하다 이따금씩 찾아와 경고해 주고 사라졌다. 잊지 마, 너는 프리랜서야.


불행인가 다행인가 모르겠다. 나에겐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지 않는 특기가 있고,  한 번에 왕창 잃어버리는 특기가 있다. 출입증, 면허증, 주민등록증, 각종 진행비 종이영수증, 취재원의 명함들이 가득 담겨있던 지갑을 잃어버렸고 재발급 신청을 했는데 이게 웬 걸, 대문짝만 하게 박혀있던 프리랜서 작가라는 타이틀이 지워져 있는 것이었다. 한글 이름, 영문 이름, 작가, 그리고 얼굴 사진.


프리랜서란 네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래봤자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나 역시 매일같이 인지한다. 그런데도 그 알량한 네 글자가 사라진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스티커로 교묘하게 붙여 가리지 않아도 되고, 어딜 가도 당당하게 출입증을 꺼내놓아도 되니까. 왜 방문자 패용증을 가지고 다녀요? 아, 프리랜서예요?라는 말에 수십 번, 수백 번 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은 정규직과 동급이 되고 싶다는 얄팍한 허세가 아니었다. 저 네 글자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출입증에게 나는 신세를 많이 졌다. 마침 사진도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나의 발걸음도 덩달아 당당해졌었다. 그렇게 분신처럼 잘 가지고 다니던 출입증을 나는 아주 오랜만에 또 잃어버렸다. 재발급 절차를 밟으며 누군가 누락한 탓에 작가라는 달랑 두 글자로 새겨졌던 직종이 다시 바뀌진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표기란에 '작가'라 적어달라고 따로 기재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불안했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고, 새로 나온 출입증엔 아주 선명한 글씨로 '프리랜서 작가'가 적혀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웃기게도 이번엔 별 생각이 안 들어서. 원하는 실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그냥 그런 거구나. 더 이상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티커를 붙여야 할 이유도 없고, 주머니 깊숙한 곳에 처박아둘 이유도 없다. 이젠 그냥 그렇게 되었다.


6월 9일은 10년 되는 날이었다. 6월 6일 현충일에 면접을 보러 갔고, 면접관이었던 선배가 '우리는 원래 공휴일도 일해요' 했던 게 금요일이었다. 나는 토요일에 연락을 받고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짜를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었다. 10주년 축하하네!라는 메시지를 받고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하루를 보냈다. 패기 어린 동료가 건넨 요구에 코웃음 치며 취재나 잘하라 말했던 선배한테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뽑아주셔서 감사했다고. 선배는 좋은 날이라며 번개나 하자고 제안해 왔다. 같은 날 입사했던, 지금은 곁에 없는 유일한 동기를 불러내 셋이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배가 아파올 정도로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나에겐 셀 수 없이 많은 변화가 생겼고, 이젠 패용증 따위 그 작은놈에게 퍼부었던 알량한 감정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졸업한 기념으로 적어두는 뿌듯한 기록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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