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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수 Nov 26. 2021

2021년 10월, 제주 (2)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숙소는 처음이다. 객실 층수가 높지 않으니 정확히는 바다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전날 밤엔 주변이 온통 깜깜해진 후 숙소에 들어와서 바다를 감상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걷고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적당한 밝기의 햇살에 물결마다 윤슬이 포근히 내려앉았다. 창가에 앉아서 전날 사다둔 빵을 여유롭게 먹고 이동할 채비를 했다. 오늘은 가장 기대했던 일정이 있는 날이다. 택시를 타고 성산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한 후, 짐만 서둘러 놓고 성산포항으로 향했다.


성산포항에는 우리처럼 우도를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도는 제주도 성산포로부터 약 15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섬이다. 제주특별자치시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가장 큰 섬이고 '섬 속의 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여행 후기를 찾아볼 때마다 사람들이 워낙 우도를 극찬해 기대가 되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전기자전거를 대여했다. 우도에서 여행할 한나절 동안 나의 발이 되어줄 전기자전거다. 정류장이 정해져 있어 코스가 제한되어 있는 셔틀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



제주특별자치시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가장 큰 섬이라고 하지만 전기자전거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리면 1시간이 채 안되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만큼 우도는 아담했다. 해안길을 따라 에어팟을 끼고 달리는 상상을 했는데 그 좁은 우도에 여행객들이 가득해서 노래를 들으며 가는 건 위험해 보였다. 다른 전기차와 전기자전거가 뒤에서 오는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음악은 포기해야 했지만 해안길을 달리는 동안 내내 눈은 행복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출발 전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중간에 한번 더 챙겨 발랐는데도 우도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피부가 벌겋게 타기 시작했다. 평소에 피부 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피부가 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우도의 가을 햇살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우도 독립서점 '밤수지맨드라미'
우도 독립서점 '밤수지맨드라미'


여행사진을 꺼내어 볼 때 그리워서 마음이 한 번씩 저릿할 때가 있다. 이 '밤수지맨드라미'라는 우도 독립서점 사진을 다시 보는 내 마음이 그렇다. 이 밤수지맨드라미는 제주도 해역 등지에 분포해있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이다. 우도에도 독립서점이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하고 이 서점을 찾아냈다.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바뀌는 듯 조용한 가운데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사운드가 좋았다. 형광등이라든지 내부 조명을 인위적으로 밝혀두지 않았지만 햇살이 서점의 깊숙한 곳까지 닿아 어둡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제주 오름에 관한 귀여운 책을 하나 구입하고 싶었는데 캐리어에 자리가 부족할까 봐 데려오지 못해서 아쉽다. 다음부터는 캐리어가 넘쳐도 꼭 여행지 독립서점에서 책 하나 이상은 데려와야겠다. 밤수지맨드라미처럼 도서 생태계의 다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독립서점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 6시간의 밀도 있는 우도 자전거 탐험이 끝나고 다시 천진항에 돌아와 배를 타고 성산포항으로 향했다. 성산에 왔으니 성산일출봉을 빼놓을 수 없었다. 다혜언니랑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번 제주 여행을 '잠죽자(잠은 죽어서 자) 여행'이라고 칭했는데 다시금 사진을 꺼내보니 정말 그렇다.


성산일출봉


다음 날 아침 섭지코지를 간단하게 산책한 후, 마지막 날도 밀도 있게 채우고자 카페 <책자국>이라는 독립서점과 보롬왓을 방문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 카페 책자국에서 1시간 정도 머무르며 책을 읽었는데 아직도 그 오후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그립다. 책상에 놓인 노트에 누군가 남겨놓은 글을 읽었다. 제주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고 싶은 예비 신랑의 메모였다. “생각처럼 판타스틱한 삶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원하고 안분하는 삶을 살다가 제주에 소소한 나의, 우리의 자국을 남기고 가렵니다. 안녕.”이라는 부분이 좋았다. 뭐랄까. 자신이 어느 곳에 거주하며 삶의 자국을 남기고 싶은지 취향을 확실히 아는 것과, 끝내 그 변화가 현실이 되었을 때 따라올 실망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여유가 부러웠다. 꿈꾸었던 제주의 삶이 현실이 된다면 공방노아 사장님처럼 때때로 후회도 하겠지만, 결국 선택으로 나아갔기에 후회라는 감정도 겪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진짜 올 거예요. 진짜 진짜 진짜로.” 진짜를 4번이나 말할 만큼 간절한 꿈을 가진 그가 부럽다. 그 꿈이 꼭 현실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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