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의 의미를 새롭게 써보기
2022년에 쓴 양궁일기를 훑어보는 여정에서 잠시 빠져나와 지금은 2024년 9월! 2024년 협회장기 추계양궁대회에 참여하기 하루 전이다. 첫 대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번째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처음 산이를 만난 날에도, 화면으로만 보던 이은경 감독님을 만난 날에도. 팬이라고, 양궁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면 이런 말이 돌아왔다.
"재밌게 쐈어요?", "즐겁게 쏘시길 바라요!"
재밌게 쏜다는 말. 양궁을 좋아하기 전에는 양궁선수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쏘고 오겠다! 이번 경기는 재밌게 쐈다!라는 말을 할 때 즐겁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양궁을 배우면서 이 즐거움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힘을 알 것만 같았다. 즐기려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그래야 후회 없는 화살을 쏠 수 있다는 걸.
사실 올해는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며 예전보다 양궁에 집중하지 못하는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기 한 달 전쯤부터 브런치에 양궁일기를 연재하면서 양(궁권)태기라고 부르는 시기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두 달 정도 양궁을 쉬기도 했고, 양궁과 다시 느슨하게 친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각을 되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대회 2주 전, 선생님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 이번 대회 목표는 재밌게 쏘고 오기! 알겠죠?" 원래 이 시기엔 대회에 맞춰 장비를 정비하기도 하고, 자세를 촘촘하게 다듬기도 하고 목표점수를 잡기도 하는데, 평소와 다른 목표가 조금 새삼스러웠다.
나에게 즐긴다! 란 준비를 촘촘하게 잘했고 나에게 의심이 없을 때, 그러니까 준비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결과가 어떻든 후회가 없을 것임을 알 때 가능한 태도라 그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선생님께 재밌게 쏘고 오는 게 힘들 것 같다는 고백을 했다. 이상하게 저번 대회보다 욕심이 더 나는 거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준비되지 않았으면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걸 아는데 이상하게 준비가 덜 되어있을 때는 마음이 조급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만 커지는 것 같다.
'재밌게 쏘라니... 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즐기는 게 불가능한데... 아! 잘하고 싶은데...'
못할걸 아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매번 강조하던 자세가 있었는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답답했다. 드로잉에서 앵커로 연결되는 동작이었는데, 며칠을 집중해서 연습해도 모르겠어서 답답한 마음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내 팔도 활의 연장이야.. 손으로 당기려고 하지 말고... 내 팔이 활... 활.... 활!!!’
조금 엉뚱한 상상이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랬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방법이 통했다. 자세가 잘 잡히고 일정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동작이 내 것이 된 것 같다는 감각이 생긴 순간부터 과녁에 꽂힌 점수가 어떻든 한 발 한 발 화살을 쏘는 게 너무 재밌게 느껴졌다. 활을 쏘며 대회에 나가서도 긴장하지 않고 이 감각대로만 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재미있게 쏘고 오기! 는 준비를 잘하고! 그래서 원하는 만큼 기량을 펼치기! 에서 이번에 배운 감각을 잊지 않고 진짜 내 걸로 만들고 오기!로 새롭게 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대회가 나에게 이번 분기의 내 양궁실력이나 양궁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증명하는 결과로써의 의미가 아닌, 앞으로 양궁을 해나가면서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로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예천에 하루 일찍 도착해 양궁으로 친해진 친구들을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선발전에 참여한 선수들을 응원하며 자세를 눈여겨보고(다들 너무 대단해...) 예천 시내를 산책하며 깨달았다.
대회를 나가기 전의 설레는 마음. 대회 전날 함께 양궁을 배우고 있는 동생과 숙소에서 활을 정비하며 나누는 양궁 이야기들. 양궁이 아니었으면 방문하지 못했을 지역을 알아가고, 그곳을 탐험하는 시간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그래서 경기장에서 처음 만났고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인데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생활체육 양궁인 친구들. 이 모든 경험과 만남들도 재밌게 쏘기 안에 포함되는 거겠다!라는 걸.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스스로 나를 몰아붙이기도 하고, 결과에 확신이 없으면 즐기는 게 어려웠던 내가, 양궁이라는 운동을 만나서 힘을 빼고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준비가 덜 된 채로 대회를 나가게 된 내일. 그 어느 대회 보다도 재밌게 쏘고 올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든다. (일단 빨리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