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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Jun 20. 2024

담다

새 방에 들인 나의 책상

담다
1. 어떤 물건을 그릇에 담다
2. 어떤 내용이나 사상을 그림, 글, 말, 표정 따위 속에 포함하거나 반영하다.


내가 들어갈 집은 왜인지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본가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평수인데도.

아직 아무것도 들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그 공간만큼 꾸려 나가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짓눌렀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엔 너무 커버렸고,

알아서 척척 해나가기엔 아직 아는 게 없었다.


담는다는 말에 가장 먼저 손바닥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둥글게 오므린 손바닥과 헐렁한 손가락 마디마디 벌어진 틈새.

한 붓 그리기처럼 복잡하게 이어진 손금과 지문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안심이 된다.

큰 손, 작은 손, 부르튼 손, 매끄러운 손, 어떤 손이든

담아낸 것을, 혹은 담아낼 것을 소중히 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다와 다 사이에 네모난 상자를 끼우면 '담다'가 된다.

언뜻 보면 '채우다'와 비슷한 결로 느껴지지만,

본질적으로 보자면 둘은 너무나 다른 단어이다.


채운다는 것은 차곡차곡 쌓아서 빈 공간을 없애는 일,

퍼즐처럼 이음새를 맞춰서 비어있는 부분을 메우는 일.

즉,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정해진만큼의 책임이란 것이 주어진다.

적정 분량에 대한 의무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굳이 더 채우지 않아도 된다.

채우는 행위가 어려운 이유는 효용성과 품질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과 잘 어우러지게 자리를 배치해야 하며,

일단 채워졌다면 자신의 쓰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기에.


하지만 담는 행위는 그에 비해 자유롭다.

담아야 하는 상자의 크기는 자신이 정하는 거니까.

상자는 그저 담기는 무언가를 위한, 온전히 그것만을 위해 마련된다.

중요한 것은 담는 행위나 상자가 아닌 담기는 그 무언가, 자체이기 때문이다.

꽉 알맞게 넣을 필요도, 넘치도록 흩뜨려놓아도 상관없다.

그래서 담아낸다는 것은 채우는 것보다 훨씬 풍족하고 여유롭고 즐겁다.


'텅 비다' 에세이에서 완전하게 텅 빈 공간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눈으로 보기에 텅 빈 공간은 순전히 '채워 넣는' 행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적이게도 빈 곳을 꽉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담아내는' 것 밖엔 없다.

담아내는 것은 때론 마음일 수도, 생각일 수도, 기분일 수도 있다.


이삿날 마주한 새로운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방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나의 새 책상이었다.

딸의 꿈을 응원하는 엄마의 마음,

이 책상에서 꾸준히 글을 쓰겠다는 나의 다짐,

종종 책상에 걸터앉아 수다를 떨던 동생의 목소리,

빈 책장에 누워 자던 강아지의 냄새,

안전하게 짐을 옮겨주신 이삿짐 업체 직원분의 땀.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방을 더 채워나가야 했지만

소중한 것들이 가득 담긴 하얀 책상만으로도 방은 이미 풍요로웠다.


그걸 깨닫자, 채워야 한다는 두려움이 남김없이 녹아내렸다.

그 대신 더 많은 나날들이 남아 있었다.

이 공간 속에 스며들어 나를 온전히 담아낼 아름다운 날들이.



소중한 글자를 눌러 담아 만든 소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밀리로드_담자연 [심장개업]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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