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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메시지 그리고 컨셉

나는 글쓰기, 혹은 책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3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곤 한다. 에피소드와 메시지, 컨셉이 그것이다. 여기서 에피소드란 내 삶에 일어났던 일들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의 책에서 읽은 지식이나 정보, 노하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만으로는 한 권의 책, 하나의 글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두 번째 요소인 메시지다. 그 경험과 정보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단순한 가전 제품 카탈로그나 일기와 다를 바 없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해석이 들어가야 비로소 하나의 책과 글로서의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메시지가 중구난방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책의 경우 필요한 것은 다양한 메시지를 하나의 단어나 개념으로 꿰뚫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요소인 컨셉이다. 예로부터 신문 기자들은 하나의 기사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들은 그걸 ‘야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책의 경우엔 필연적으로 최소 40여 개의 생각, 주장이 담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들이 서로 따로 논다면 그 책을 읽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 되겠는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컨셉이다.


사실 컨셉은 브랜드 용어다.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짧은 순간에 강렬하게 인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나 메타포, 개념 등을 우리는 컨셉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볼보 하면 우리는 ‘안전’을 떠올린다. 이니스프리나 삼다수 하면 ‘제주’를 떠올린다. 옛날엔 하이트 하면 ‘천연 암반수’를 떠올렸다. 햇반은 ‘집밥’을, 초코파이는 ‘정’을 연상케 하는데 성공했다. 이렇듯 그 제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특장점을 기억나게 할 수 있는 컨셉은 브랜딩 과정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손꼽힌다. 그만큼 효과 역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선명한 컨셉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책들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책들 중에 ‘90년생이 온다’와 ‘82년생 김지영’이 있다. 여기서 90년 생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MZ 세대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누가 읽을까? 바로 이 MZ세대들의 머릿속이 궁금한 40대 50대 상사나 사업가들이 읽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책을 ‘MZ세대가 온다’고 했다면 얼마나 평범했을지 생각해 보라.


‘82년생 김지영’은 단지 1982년생 만을 의미하는 제목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공감할 수 있는, 공감하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컨셉인 셈이다. 72년생 남자인 내가 이 책을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면 이미 끝난 게임 아닌가. 이처럼 한참을 붙들고 설명해야 할 이 책의 메시지를 단 하나의 단어, 제목, 개념, 메타포로 압축하는 과정이 바로 컨셉이다. 그리고 에피소드, 메시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 컨셉이다.


최근 나는 지방의 어느 고깃집 사장님 책을 대필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인터뷰를 하다가 그분의 입에서 ‘식당체력’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몸 좋은 사람이 와도 하루를 못 견디는게 식당일이다. 하지만 깡마른 사람이 몇년 동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식당에만 필요한 체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 체력이 단지 피지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소한 체력의 셰프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건 멘탈적인 요소, 즉 그 일에 대한 재미와 절실함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을 ‘식당체력’이라고 지어도 되지 않을까? 이영미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마녀체력’처럼 말이다.


그러니 글을 쓰고 싶다면, 나아가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면 그 안에 들어갈 에피소드들을 미리 준비해두자. 마치 요리를 준비하는 사람이 다양한 식자재들을 정렬해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떤 요리를 만들지를 미리 구상하는 것처럼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를 가능한 구체적으로 미리 적어두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수많은 에피소드와 메시지를 관통할 수 있는 명료한 ‘컨셉’을 고민해보자. 물론 이 컨셉이 꼭 그 글과 책의 제목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컨셉의 유무다. 이것까지 가능하다면 이미 당신은 글쓰기의 프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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