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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CHWI), 전통의 향기로 오늘의 공간을 채우다

박물관의 유리벽 너머에 박제된 전통은 힘이 없다. 그것이 진정한 생명력을 얻으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야 하고, 그들의 일상적인 공간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이러한 명제를 비즈니스로 가장 명민하게 풀어낸 스몰 브랜드가 바로 '취(CHWI)'다. 한국의 미(美)를 향기와 오브제로 재탄생시킨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을 넘어, 잊혀가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 속으로 ‘취하게’ 만들고 있다.


1. 이름 속에 담긴 중의적 가치: 취향과 취함


브랜드의 이름 '취'는 시작부터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드는 '취(醉)하다'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의미하는 '취(趣)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는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기분 좋게 취하고, 그것을 케케묵은 옛것이 아닌 세련된 나만의 취향으로 간직하라는 메시지다.


스몰 브랜드가 거대 자본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명확한 관점'이다. 취는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제안한다"는 한 문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들은 한국적인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 곁에 슬며시 놓아둔다.


2. 정서의 후각화: 한국인의 DNA를 깨우는 향기


취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매개체는 바로 '향기'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는 흔한 서양식 향료의 조합에서 벗어나, 한국인이라면 무의식중에 간직하고 있을 법한 공간의 기억을 후각적으로 재현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향인 '수촌(Soot)'은 비 온 뒤 숲속의 흙 내음과 아궁이에서 나무가 타 들어갈 때 나는 쌉싸름한 연기 향을 절묘하게 배합했다. 이는 도시의 빌딩 숲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골 할머니 댁 마루에 앉아 있던 평온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담양의 울창한 대나무 숲을 연상시키는 '대나무(Bamboo)' 향이나 선비의 고결한 기품을 담은 '난초(Orchid)' 향은 자극적인 인공 향에 지친 소비자들에게 '정서적 휴식'이라는 가치를 제공했다. 이들의 향기는 단순한 탈취나 방향의 목적을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한국적인 정서'로 치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3. 공예의 현대화: 노리개와 옹기의 화려한 외출


취가 영리한 점은 향기를 담아내는 그릇, 즉 '오브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이들은 전통 공예를 현대적 디자인 문법으로 번역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전통 노리개 키링'이 있다. 한복 저고리에나 다는 장신구로 여겨졌던 노리개를 이들은 과감하게 일상 속으로 끌어내렸다. 전통적인 매듭 방식은 유지하되, 요즘 세대의 가방이나 소지품에 어울릴 수 있는 세련된 색감과 소재를 선택했다. 이는 MZ세대 사이에서 '별다꾸(별걸 다 꾸미는)' 트렌드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한, 가마솥이나 옹기처럼 지극히 토속적인 기물을 모티브로 한 캔들 워머나 디퓨저 용기는 인테리어 오브제로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산한다. 전통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미니멀한 현대 가구와 어우러지는 이들의 감각은, 스몰 브랜드가 어떻게 '디테일' 하나로 고급스러운 브랜딩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이다.


4. 진정성의 뿌리: 로컬 그리고 장인과의 협업


스몰 브랜드가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그 근간이 되는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 취는 단순히 겉모양만 한국적인 것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제품의 원료와 제작 과정에서 한국의 로컬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진정성을 확보한다.


담양의 대나무, 제주의 편백 등 실제 지역의 상징적인 원료를 채취하여 향료를 추출하고, 지역 공예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품을 생산한다. 이러한 행보는 고객들에게 브랜드가 지닌 '진정성'을 전달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소비자들은 취의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단순히 예쁜 물건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로컬 문화를 지지하고 장인의 기술을 계승하는 가치 있는 소비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5.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취향이 되는 법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은 취(CHWI)에 이르러 비로소 세련된 비즈니스 모델로 완성되었다. 이들은 전통을 숭상해야 할 대상이 아닌, 즐겨야 할 '놀이'이자 '취향'으로 만들었다.


성공한 스몰 브랜드가 그러하듯, 취 역시 대중 전체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향유하고 싶은 소수의 '찐팬'들을 공략했고, 그 결과는 강력한 팬덤으로 이어졌다. 박물관 속에 잠자던 전통을 꺼내어 오늘의 방을 향기롭게 채우는 취의 행보는, 우리 문화유산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브랜드의 힘은 '규모'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어떤 '깊이'로 남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취는 향기로운 연기처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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