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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원의 특별한 변신 이야기, 유니콘 프로젝트

나는 대학을 두 번 나왔다.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수능을 쳤다. 처음 선택한 전공이 너무나 맞지 않았다. 2학년 첫 수업에서 복식부기의 복잡다단함을 보고 이 길이 아님을 즉시 깨달았다. 제대 후 약 6개월 간 집 근처 독서실에서 새벽 3시까지 알바를 하며 수능 준비를 했다. 간절함이 있기에 힘들지만은 않았다. 시험 문제의 지문을 책처럼 읽었다. 언어는 소설처럼, 사회탐구는 비소설처럼, 영어 역시 재미있는 원서처럼 읽었다. 간절함과 재미가 그렇게 연결되었다. 막상 수능시험을 치던 날은 창가에 들이치는 햇살을 만끽하며 연습하듯 문제를 풀었다. 공부의 재미를 온몸으로 느낀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재미는 대학생활로 이어졌다.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전공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토론 수업의 발표는 도맡아 했다. 그때의 그런 나를 조금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내 삶은 또 한 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년의 삶을 성찰하고 계획하는 '디자인 2019'라는 모임에서였다. 같은 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통해 수원에 있는 수학학원의 원장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일은 어떤 것이든 잘 해내는 '제네럴리스트'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학원 원장님이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내게는 신선하게 들렸다. 하나의 학원을 운영할 정도의 분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자리는 아니었으므로 특별한 이야기의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몰 스텝의 운영진으로 합류하면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약속을 지켰다. 맡은 일은 책임을 다했다. 한 번도 투덜대는 법이 없었다. 무엇이든 맡기면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만 여행을 다녀온 그녀가 만남을 요청해왔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강남역 인근 스타벅스 리저브에서 아침 일찍 그녀를 만났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얘기해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의 선생님이었던 지금의 대표님과 제자들이었던 친구들과 함께 10여 년 전 공부방을 시작했노라 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방이 학원으로 성큼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학원은 그녀에게 보람과 만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길인지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없었다. 이 후 약 5년 간 동네의 조그만 에스테틱의 원장일을 했다. 피부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그 일도 열심히 했다. 당연히 성과도 좋았다. 하지만 학원 일을 할 때와 똑같은 의문의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일은 나다운 일인가. 평생 만족하며 지속할 수 있는 일인가. 그 질문에 도저히 답할 수 없었다. 마침 이전에 함께 운영하는 대표님으로부터 수원에 있는 학원의 원장직을 제안받았다. 그 날은 그가 학원에서 처음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자리였다. 조용히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내 귀가 크게 열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니콘 프로젝트라고 했다. 영어로 'You need confidence(너에겐 자신감이 필요해)'의 약자라고 했다. 영어나 수학이 아닌 전혀 다른 형태의 수업 프로그램이었다. 주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는 한 달에 100개의 '성찰일기'를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문학 혹은 비문학 지문을 읽어보는 낭독 프로그램도 있었다. 대형 서점을 방문해서 자신이 관심있어하는 주제에 맞는 책을 직접 구매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팀 혹은 개인이 주체가 되어 보고서를 만들어보는 과정도 있었다. 학생이 1년 동안 직접 탐구할 주제를 선정해 공부하는 진로캠프와 학부모 워크샵도 있었다. 그렇게 과정을 마친 친구에게는 무지개 빛이 찬란한 유니콘 뱃지가 주어졌다. 수학을 가르치는 전문 학원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무엇보다 스몰 스텝 모임을  함께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어 놀라웠다. 매일 일기를 쓰고, 낭독을 하고, 서점을 방문하고, 보고서를 써보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탐구하는 프로그램이 지금의 중, 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하다니. 그것도 현직 학원 원장님이 직접 이런 프로그램을 구상하셨다니. 이런 변화가 스몰 스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니. 반갑고 즐겁고 행복했다.



자리를 식당으로 옮겼어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녀는 대만 여행을 막 다녀온 참이었다. 온라인으로 알게된 한국인 스페인언 선생님의 소개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거기서 절반 정도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단 한 번 만난 낯선 사람과의 관계가 우정으로 이어진 경험이었다. 아이들의 스펙 쌓기에만 올인하는 여느 다른 원장 선생님과도 많이 달랐다. 비로소 그녀가 가진 남다름의 실체를 조금은 알 수 있을 듯 했다. 누가 해도 평범한 일 중의 하나가 학원 운영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남다르게' 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남다름은 바로 그 자신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 여행을 통해 만난 전 세계의 사람과 나누는 인사이트 넘치는 생각들,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연구와 성찰, 평범하게 살지 않으려는 용기와 도전 정신... 유니콘 프로젝트는 그런 그녀의 남다름이 만들어낸 '남다른' 프로젝트였다. 다행히 그 시도는 학부모들의 호응을 얻어 이미 1기 졸업생 배출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 만난 그녀의 머릿 속은 새롭게 시작한 2기 프로그램의 구상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장 쉬운 삶은 관성을 따르는 삶이다. 남들 하는대로 따라 사는 삶이다. 남들이 좋다는 직업을 선택하고, 남들이 맛있어하는 맛집에 열광하며, 남들이 흠모하는 인생에 목숨을 거는 삶이다. 하지만 그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원본으로 태어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복제한 가짜의 삶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 그것은 자신이 하는 아주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평범한 학원 하나를 운영해도 어떻게 '남다르게' 운영할지를 고민하는 삶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유니콘 프로젝트'는 자신을 향한 치열한 질문이 만들어낸 빛나는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열망이 아이들을 향한 애정어린 고민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여전히 이 학원은 수학을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공부의 이유와 재미도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이 학원은 특별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마도 알게 될 것이다. 공부가 주는 재미를, 공부가 가진 원래의 의미를, 공부가 주는 뿌듯함의 실체를. 내가 두 번째 수능 시험을 치르면서 느꼈던 뿌듯함이 그랬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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