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려고 온 여행인데 내 맘이 안 그래
여행은 즐겁고 행복하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의 일상이 불행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답하겠지만, 새로운 환경에 놓인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신나고 가슴이 뛴다. 소설가 김영하는 사람들이 호텔로 휴가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집이라는 공간과 연관 지어 이렇게 설명했다.
호텔이라는 곳은 우리 일상의 근심이 없어요.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어요. 집에는 여러 가지 근심들이 있고 어떤 일을 겪었던 것, 부딪혔던 것, 상처 받은 일들이 있는데 호텔에 들어가는 순간 잘 정돈되어 있고 깔끔하고 그저 나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거예요.
여행 역시 일상의 자질구레한 신경 쓸 일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새로움으로 가득 찬 장소를 방문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고민거리나 업무에 얽매일 것 없이 그저 알차게 주어진 시간을 쓰고 오는데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에 지겨운 줄 모르고 계속 가게 되는 것 같다.
오래전 예약한 비행기 티켓의 출발일이 곧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면 그때부터 성급한 나의 여행은 이미 시작된다. 캐리어에 챙길 물품들을 리스트로 정리해서 빠뜨리는 건 없을지 체크해가며 준비하고, 사진으로만 바라보던 명소들을 기준으로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려본다. 그 그림 같은 장소에서 내가 여유롭게 걷고 있다. 바람은 선선하고 발걸음은 가벼우며 여행을 즐기는 나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이 될 것만 같은 설레는 기분은 인천공항의 들떠있는 공기를 맞이하며 주체 못 하고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일찌감치 도착해 비행기 출발 시간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기내식을 몇 차례 먹고 자고 하다 착륙 후 수하물 찾기를 거쳐 마침내 숙소까지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기대감은 점점 활강을 하고 갈망하던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렇게 고대했던 여행인데 왜냐고? 언젠가의 여행은 날씨가 잔뜩 흐려 경치가 보이지 않았고, 밀려드는 주문으로 지친 식당 점원은 날이 서있었으며, 어느 날은 바보같이 길을 잃었고 가끔은 늦잠을 자느라 소중한 오전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머리로만 그려오던 이상에 못 미치는 현실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 우울함은 그렇게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한 달도 전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견고해 보이기만 했던 기대감은 적대심 가득한 상대방의 눈길 한 번에, 장난기가 섞인 꼬마의 '니하오' 한 마디에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모두 내팽개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울한 기분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정해진 계획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한 달 전의 나는 열정이 넘쳤고, 그때의 내가 세웠던 부담스럽게 빡빡한 일정은 막상 실행하기엔 무리였던 지라 이 일정은 뒤로하고 쉬기로 했다. 길을 걷다 눈에 보이는 벤치에 잠시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더위를 먹었는지 어지러웠던 정신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컨디션이 난조를 보이고 걷는 게 무리라면 숙소의 푹신한 침대에서 잠시 낮잠을 청해 보는 것도 좋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고 기분이 나아져 남은 여행을 즐길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걸음을 옮겨보자.
기대했던 장소가 실망스럽다면 구석구석으로 눈을 돌려보자.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은 넓게 펼쳐진 잔디밭 풍경이 아름답지만, 곳곳에 오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상방뇨를 해야 그 정도로 악취가 나는 걸까? 팔찌 강매로 유명한 곳이라 익히 들어서인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후각 어택에 충격을 받았던 곳이었다.
기대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실망을 하게 되어 있고(하지만 에펠탑은 최고였다),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 항상 실망을 되풀이하게 된다. 잘 다듬어진 사진으로 보던 명소가 실제로 보니 감동이 덜하다면 주변의 것들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좋다. 파리에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것은 길거리의 가게들, 버스킹을 하던 아티스트들, 조그맣게 그려져 있던 귀여운 낙서들이었다.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이라 생각하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늦은 밤, 인적이 드문 지하철 역사 안에서 친절을 베푸는 행인에게 한눈 팔려 백팩에 있던 물건들을 털릴 뻔했다. 짐을 훔치려 했던 청년들은 분명히 질이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뒤에서 조심하라며 소리쳐주고, 여기저기 떨어진 내 소지품을 주워주며 걱정스레 괜찮냐며 물어본 사람들은 너무 좋은 분들이었다. 이런 일도 있는 거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애꿎은 도시에게 나쁜 인상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여러 곳을 여행했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잠깐잠깐 우울함은 찾아오곤 했다. 꽤 단련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여행지에서도 언제든 슬퍼지고 우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언제든지 이곳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여유를 가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