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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어른 Jan 06. 2024

+147, 캐나다 전역을 휩쓴 독감, 아이가 아프다.

아이와 세계여행 중 가장 힘든 일

매일 남기던 기록이 며칠 째 없다. 매일 발자취를 남기는 게 하찮게 느껴진다. 정우가 아프다. 아픈 아이 곁을 지키는 시간과 기록을 남기는 시간의 가치를 차마 비교할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가장 많이 아팠던 4일이었다. 초강력 태풍이 세력을 잃어가듯 조금씩 평온해지고 있다. 여전히 아이의 체온은 38도가 넘고 기침도 있지만, 지난 4일을 회상하면 지금 상태에 감사할 뿐이다.


체온계 앞자리에 4자가 보이면 공포가 몰려온다. 세상의 모든 상념이 사라진다. 삶의 그 어떤 가치도 아이의 정상체온만큼 중요한 건 없다. 가장 싫어하는 숫자 38, 39다. 모든 신경을 체온계에 집중한다. 희비가 엇갈린다. 정상 체온일 때 38이라는 숫자는 야속하지만, 40도를 넘나들 때면 38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나 반갑다.


항공료 45만 원을 절약하고자 모든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린 아빠는 토론토와 밴쿠버의 시차, 저가항공사의 연착가능성과 하와이에서 얻은 교훈을 완전히 망각했다.  


3시간 연착에도 비행기를 타서 즐거운 아이


자정이 넘어 도착한 밴쿠버 공항에서 수하물 기다리는 중


3시간 연착으로 밴쿠버에 밤 11시 도착했다. (토론토 기준으로 새벽 2시, 동-서부의 시차는 3시간)

공항에서 짐 찾고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새벽 1시다. 우리 부부는 감각을 잃은 채 그 새벽에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이의 컨디션은 안중에도 없다. 정우가 태어난 이후 이렇게 밤을 새운 적은 없다. 이동으로 인한 피로와 허기에 지친 나머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비행기에서의 5시간 역시 여정 중 가장 불편했을 만큼 힘들었다. 어른도 적응하기 힘든 시차를 막 5살 된 아이가 감당하기 버거웠을 거다.  


매일 밤 남편과 번갈아가며 보초를 선다. 40도를 넘나드는 고열로 두 눈의 초점을 잃어가고, 차디찬 손발을 주무르는 아빠 엄마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하다. 힘없는 정우의 두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흐른다.



열꽃으로 온통 붉은 얼굴, 힘없이 아빠에게 안겨있다.


"정우야. 왜 그래? 왜 울어? 아파서 우는 거야?"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저 눈물만 뚝뚝뚝 흘리다가 나를 안는다. 저 작은 아이가 얼마나 힘들까.. 속으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정우가 사지를 부르르 떨며 몸을 떤다. 내 몸이 부서져라 껴안는다.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껴안는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따뜻한 부위를 찾아다닌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본다. 목덜미도, 등도... 온몸이 불덩이다.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아프면서 크겠지만, 40도를 넘나들던 3일은 길고, 무섭고 힘들었다. 타지에서 한 밤에 고열로 들끓는 아들을 부둥켜안던 날을 기억하며 여정을 보내자.


더 많이 사랑해주자. 많이 놀아주고, 많이 웃어주고, 원없이 안아주자.

정우야, 미안하고 잘 이겨줘서 고맙고 사랑해~




밴쿠버 일정을 마치고 사촌동생 Gina가 사는 Kamloops로 넘어가기로 했다. 차로 4시간 거리라 렌터카를 알아봤지만 차 반납이 여의치 않아, 버스를 타야한다. 오전 8시, 오후 4시 버스가 있다. 여유롭게 오후 버스를 타고 싶지만, 10시 체크아웃 후 아픈 아이를 데리고 버스 시간까지 머물 곳이 없으니 오전 버스를 타야 한다. 8시 버스를 타려면, 대체 몇 시에 일어나야 하며, 우버를 타고 70kg 넘는 짐 운반할 생각을 하면 삶 자체가 고달프다는 생각이 든다.


정우의 고열이 계속 이어지고, 교차복용을 해봐도 도통 차도가 없다. 약국에 갔다가 약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어린 나이에 5일째 고열은 위험하다며 병원 진찰을 받는 게 좋겠다며, 응급 예약을 해주었다. (캐나다는 공공진료로 당일 진료받는 게 아주 어렵다.) 의사를 만나기로 한 응급 예약시간이 오후 2시였는데, 1시부터 정우가 슬슬 몸을 가누질 못한다. 다시 고열이 시작되며 입을 닫고, 눈에 초점을 잃어갔다. 아이를 들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불안한 마음으로 의사를 만나 가장 걱정했던 폐 소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주 깨끗하다. 귀와 목 상태가 좋다는 말을 들으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혹시나 폐렴으로 발전하면 어쩌나 내내 걱정했다. 캐나다 전역에 유행 중인 독감에 걸렸단다.


Gina에게도 상황을 전했다. 내일 캠룹스로 아침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지만, 제부가 직접 4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밴쿠버로 와주기로 했다며, 우리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이미 출발했단다. 예의상으로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며 오지 말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의사의 긍정적인 소견을 들은 뒤, 오서방이 오기로 했다는 말까지.. 마치 삶의 끝자락에서 회생한 기분이다.


너무 힘들던 오후 1시였다. 그리고 너무 행복했던 오후 3시였다.

인생은 앞으로도 늘 이럴 것이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말고,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자.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특히 힘들 때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이를 잊을 수 없다. 제부가 하루 9시간을 운전하며 우리를 실어 날랐다. 미국에서 9시간 운전해 봤을 때,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지 잘 알고 있다. 전혀 내색을 안 하는 제부지만, 많이 피곤했을거다.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덧붙이는 말,

500일 세계여행 중 아이가 크게 아팠던 것은 하와이에 이어 두 번째다. 하와이에서도 야간 비행기를 타는 무리한 일정 뒤, 장시간 바다수영으로 햇볕에 노출되어 열사병 증상이 있었고, 캐나다에서는 야간 비행 이후 북미 전역을 휩쓴 독감에 걸렸다. 더구나 캐나다 전 지역에 감기약이 동이 나서 그 어떤 약을 구할 수 없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타미플루는 어른 약조차 없고, 어린이용 해열제 또한 구할 수 없어서 의사가 어른용 이부브로펜을 쪼개서 먹이라고 했다.


참고로 캐나다를 비롯한 서방 국가에서는 만 12세 이하 어린이에게 항생제 처방이 금지돼있어, A형 독감에 걸려 고열이 5일 이상 지속되어도, 해열제 교차복용과 꿀을 먹이라는 처방 외에는 별다른 처방이 없다. 한국과 전혀 다른 의료체계에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속이 타들어갔다. 토론토 조카들을 위해 사갔던 어린이용 타이레놀 시럽과 애드빌 츄어볼을 Y언니에게 다시 택배로 받아서 먹였을 정도다.


** 한국에서 준비해 간 감기약과 해열제가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전부 소진되어 현지에서 약을 구매했다. 참고로 미국 약이 가장 효능이 빨랐다. (뮤시넥스 시럽 추천)


이번 기회를 교훈삼아 이동 시 아이 컨디션을 고려하여 스케줄을 짜게 되었다. 

항공료가 아무리 비싸더라 야간 비행기는 타지 않는다. 일주일 중 하루는 반드시 숙소에서 휴식하고, 아이의 취침은 하루 10시간 이상 등 여행규칙이 생겼다. 아이와 함께 하는 세계여행에서 아이가 아픈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여행지를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어른들의 욕심을 버리고, 건강하게 여행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른들은 하루 푹 쉬면 금방 낫지만, 연약한 아이들은 다르다. 글 쓰고 있는 지금도 아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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